건봉사(乾鳳寺)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19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만일염불회로 유명한 금강산의 절.

개설

금강산 남쪽에 소재한 건봉사(乾鳳寺)는 520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고려초에 도선 법사가 서봉사라고 사찰명을 고쳤으며, 고려말에 나옹 화상이 다시 건봉사라고 고쳐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원당으로서 어필이 봉안되고 전답이 하사되었으며 각종 잡역이 면제되었다. 19세기에는 여러 명이 모여 10,000일 동안 염불하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이어져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만일염불 도량이 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고려시대

건봉사는 서쪽에 봉황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서쪽을 의미하는 ‘건(乾)’과 봉황의 ‘봉(鳳)’자를 합쳐서 건봉사라고 하였다. 1928년에 이대련(李大蓮)과 한용운(韓龍雲)이 정리한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及乾鳳寺本末事蹟)』에 의하면, 520년에 아도 화상이 금강산 남쪽 기슭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758년에 발징(發徵) 화상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개설하였으며, 937년에 도선(道詵) 법사가 원각사를 중건하고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기 때문에 서봉사(西鳳寺)라고 개칭하였고, 1358년에 나옹(懶翁) 화상이 서봉사를 중수하고 건봉사(乾鳳寺)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1465년(세조 11)에 세조가 직접 방문하여 건봉사를 원당으로 정하고, 왕실 가족의 위패와 왕실 하사품을 보관하는 어실각(御室閣)을 건축하였으며, 전답과 친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교지를 내려 원당으로 정하고 요역(徭役)을 면해 주었으며, 1552년(명종 7)에 명종이 교지를 내려 전답을 하사하였다. 1650년(효종 1)에 효종이 교지를 내려 원당을 정하고 어실각을 중건하였고,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사리를 보관하는 불장(佛帳)과 탁의(卓衣)를 하사하고 천금(千金)을 하사하여 불상을 개금하였다. 1754년(영조 30)에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상궁 이씨와 안씨를 보내 석가상을 조성하고 팔상전을 세워 원당으로 정하고, 그 해 8월에 영종이 숙종의 어제절감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하사하여 어실각에 봉안하고 요역을 면제하였으며, 1776년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국재(國齋)를 개설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는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역임했던 이최원(李最源)에게 건봉사에 대해 묻고 나서 말하기를, 건봉사는 열성조(列聖朝)의 어필(御筆)을 봉안하였으므로 하루빨리 불사를 통해 사찰을 일으켜야 하며 모든 잡세(雜稅)를 탕감하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2년 8월 1일).

(3) 19세기~일제강점기

19세기 건봉사는 만일염불회로 유명하여 많은 염불 수행자들이 찾았던 곳이다. 만일염불회란 출가자와 재가자를 가리지 않고 10,000일을 기약하여 염불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건봉사 제1차 만일염불회는 신라 경덕왕 때로 알려져 있다. 『건봉사본말사적』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연간에 발징 화상이 무리를 모아 1만일을 기약하여 염불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욱면비염불서승조(郁面婢念佛西昇條)」이다. 「욱면비염불서승조」에 팔징(八徵)이라는 인물이 염불해서 서방극락으로 올라갔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팔징’과 ‘발징(發徵)’을 같은 인물로 보고 건봉사의 만일염불과 연결시켰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건봉사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건봉사의 신라시대 만일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후기 택당(澤堂)이식(李植)이 지은 『수성지(水城志)』에 보인다. 이식은 신라시대 건봉사에서 발징 화상이 무리를 모아 염불하여 극락왕생했다고 하였다. 또 기성쾌선(箕城快善)이 지은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과 연담유일(蓮潭有一)이 지은 「연지만일회서(蓮池萬日會序)」에서 발징 화상이 건봉사에 염불회를 개설하여 왕생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발징 화상에 대한 이야기가 건봉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실제로 건봉사에서 만일회를 개최하도록 추동하여 제1차 발징 화상의 만일회를 계승하는 제2차 만일회가 1801년(순조 1)에 개설되었고, 이어서 제3차 만일회가 1851년(철종 2), 제4차 만일회가 1881년(고종 18)에 개설되었다.

이렇게 만일회가 개설되는 동안 왕실에서도 시주하여 1820년(순조 20)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평상을 하사하여 어실각에 두었으며, 1848년(헌종 14)에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금품과 집물(汁物)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1878년(고종 15) 4월 3일에 큰 산불로 본사와 암자 3,183칸이 모두 불에 타버린 이후 1879년(고종 16)에 왕실과 조정 대신들로부터 불구(佛具)와 금품을 기증 받아 대웅전, 어실각, 명부전 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건봉사를 원당으로 정하고 교지를 내려 일체의 요역을 혁파하였다. 당시 왕실에서 건봉사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1882년(고종 19)에 금강산유점사(楡岾寺)가 화재를 당해 중건할 때 건봉사의 예에 따라 비용을 지원했다고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종실록』 19년 9월 10일).

20세기에도 만일회는 이어져 1908년(순종 1)에 제5차 만일회, 1921년에 제6차 만일회가 개설되어 건봉사는 만일염불회의 성지(聖地)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에 건봉사는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인근 9개 말사를 관할하였다. 1920년에는 인천 포교당과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세웠고, 1926년에는 불교 전문 강원을 설치하고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하였다. 한국전쟁 때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된 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근래에 다시 중창되었다.

참고문헌

  • 『수성지(水城志)』
  • 韓國學文獻硏究所 編, 『乾鳳寺本末事蹟』, 亞細亞文化社, 1977.
  • 한보광, 『신앙결사연구』, 如來藏, 2000.
  • 이종수, 「19세기 건봉사 만일회와 불교사적 의미」, 『동국사학』49, 동국대학교사학회, 2010.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