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준도(八駿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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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장에서 탔던 여덟 마리의 준마(駿馬)를 그린 그림.

개설

「팔준도(八駿圖)」는 조선 태조가 고려말의 혼란기에 전장에서 탔던 여덟 마리의 준마를 그린 그림이다. 세종이 1446년(세종 28)에 「용비어천가」 중 태조의 전공과 조선 개국을 칭송한 ‘팔준’을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찬문을 쓰게 하였다. 「팔준도」는 1447년(세종 29)에 권축 형식으로 다시 그려졌는데, 세종은 문신들의 중시(重試)에서 「팔준도」 관련 시제(詩題)를 내기도 하였다. 그 이후 「팔준도」가 문인들의 시문에 다수 등장하는 계기가(→게) 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준도」가 있는데, 모두 16폭으로 구성되었다.

제작배경

박팽년의 문집 『박선생유고』에 실린 「팔준도송병서(八駿圖頌幷序)」에 의하면, 1445년(세종 27) 신하들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 125장 중에 ‘팔준’이 포함되었다. 이에 세종이 곡을 짓게 하여 조정과 종묘에 쓰게 하였고, 1446년에 태조의 덕과 신공을 뒷받침한 팔준을 그려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태조의 조선 개창에 대한 공과 전장에서의 전공을 기리도록 하였다. 세종은 화가 안견에게 명하여 여덟 준마를 그림으로 그리고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에게 찬문을 쓰게 하였다. 이듬해인 1447년에 다시 「팔준도」를 작은 그림으로 제작하여 권축(卷軸)으로 장정하였고, 이후 여러 문신들이 이를 칭송한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그해 세종은 근정전 뜰에서 치른 문신들의 중시에 ‘집현전에서 팔준도를 올리는 전(箋)을 모의한다’는 시제를 냈다. 이에 하연이 먼저 팔준시 한 수를 올렸고 세종은 여러 문신들에게 화답시를 짓게 하여, 그것들을 모아 족자로 만들어 집현전에 보관케 하였다(『세종실록』 29년 8월 18일).

변천

1463년(세조 9)에 세조는 세종이 태조의 팔준도를 그리게 한 고사에 따라 자신이 잠저시절 탔던 12준마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최항(崔恒)에게 「십이준도찬병서(十二駿圖贊屛序)」를 쓰게 하였다. 이는 세조가 탔던 12준마를 통해 계유정란을 합리화한 내용이다.

이후 태조의 팔준도나 세조의 십이준도는 1498년(연산군 4) 연산군대에 와서 사준도로 계승된다. 조선전기 왕실 말 그림의 계보를 잇는 팔준도, 십이준도, 사준도는 조선 태조, 세조, 연산군의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결국 1705년(숙종 31)에 숙종이 원나라 조맹부가 그린 「팔준도축」을 감상하고 난 후 태조의 팔준도를 상고하여 민간에서 전해지던 「팔준도」를 모사하여 궁중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 「용비어천가」에 수록된 주석과 찬문을 쓰게 하고 숙종이 직접 어제 찬과 소서(小序)를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1867년(고종 4) 고종은 태복시에서 보관하던 태조의 「팔준도병」을 보고 이를 모사하게 하여 화첩으로 만들어 경모하였다. 따라서 고종대에는 태복시에서 수리한 병풍 형식의 팔준도가 있었고 이를 화첩으로 다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준도」는 모두 16폭으로 구성되었다. 겉표지는 나무판을 비단으로 감싸 장정하였고, 그림은 비단 바탕에 네 테두리를 장지로 둘러 고정시켰다. 표지 좌측에 전서로 ‘팔준도원헌진장(八駿圖元軒珍藏)’이라 쓴 제첨이 붙어있고, 제1폭 우측 하단에 ‘원헌(元軒)’이라 새긴 주문방인이 날인되어 있어 헌종이 소장한 것으로 170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첩의 구성은 우측에 팔준도가 횡운골(橫雲鶻),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순으로 한 필씩 8폭에 그려졌고, 좌측 화면에는 행서로 「숙종어제팔준도병소서(肅宗御製八駿圖幷小序)」, 성삼문이 찬한 「팔준도명병인(八駿圖銘竝引)」, 이계순이 찬한 「팔준도찬병서(八駿圖贊竝序)」와 「용비어천가」의 「팔준도지병찬(八駿圖誌竝贊)」을 8폭에 나누어 적었다.

횡운골은 걷다가 뒤를 돌아보는 옆모습으로 표현한 백색 말로 맞바람을 받아 갈기와 꼬리가 심하게 휘날리고 있는 강한 동세를 표현하였다. 유린청은 정면을 응시하는 청색 말로 팔준마 중 가장 건장한 풍채이다. 추풍오는 풀밭에 드러누운 흑색 말로 묘사되었다. 발전자는 뒤를 돌아보는 뒷모습으로 적색에 흰 코와 흰 발이 특징이다. 용등자는 풀밭에 멈추어 서 있는 자색 말로 준수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응상백은 앞을 향해 천천히 걷는 순백색의 말이며, 사자황은 풀을 뜯고 있는 황색 얼룩말로 묘사되었다. 눈가에 흰 띠가 둘러져 있고 갈퀴가 목 주위를 휘감아 내려와 있다. 마지막으로 현표는 천천히 걷고 있는 얼룩무늬의 말로 다리가 몸집에 비해 비교적 짧게 묘사되었다.

사료적 가치

「팔준도」는 조선왕조의 개국 정당성과 왕통 계승에 대한 시각적 상징으로 세종대부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지속적인 관심 대상이었다. 조선초기 대표적 화가 안견을 비롯한 궁중 화원이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시문으로 읊어져 조선시대 말 그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정병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준도」」, 『미술사학연구』 189, 한국미술사학회, 1991.
  • 진준현, 「태조 이성계의 팔준도」 1·2, 『대한토목학회지』 제54권 제9호, 대한토목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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