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곡(統營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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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통제영에서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운영하던 환곡.

개설

임진왜란 중에 창설된 통영곡은 통제영(統制營)의 중요한 재정 기반이 되었다. 통영곡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삼남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정조실록』 2년 11월 20일). 통영곡은 17세기에는 300,000석 정도의 규모였고, 18세기 후반 들어서는 장부상의 액수가 300,000~400,000석에 달하였다. 그러나 실제 통영곡은 200,000~300,000석 정도가 유지·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76년 당시 전국 각 기관의 환곡에서 징수하지 못한 비율은 평균 15%였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에 소재한 통영곡의 경우, 징수하지 못한 비율은 각각 22%와 33%를 기록하였다. 이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통영곡 모곡(耗穀)을 경상도의 통영으로 이전하여 재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통영곡 운영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는 통영곡의 모곡을 통제영이 있는 고성까지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운반 비용과 관련해서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통영곡의 모곡을 돈으로 징수하는 방안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기관에서도 통영곡과 같은 조치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어, 새로운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이순신(李舜臣)이 경상·전라·충청도의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면서 통제사라는 직책이 만들어졌다(『선조수정실록』 26년 8월 1일). 통제사는 경상우수사가 겸임하였으며, 삼남 수군을 통할하는 해상 방어의 총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삼남 지역의 수군이 사용하던 군량의 남은 것을 호조(戶曹)의 관리 아래에 두어 통영곡을 창설한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삼남 지역에 산재해 있는 통영곡의 이자로 고성에 있는 통제영의 재원을 삼았다.

내용

임진왜란 이후에 경상·전라·충청도 삼남 지역에 설치된 통영곡은 회부곡(會付穀) 혹은 회내곡(會內穀)·회외곡(會外穀)으로 구분되었다. 회부곡은 호조와 중앙 각 기관의 회계에 편입된 것이며, 회외곡은 통영이 독자적으로 회계 운영을 주관한 환곡이었다. 통영의 자체적인 운영 경비를 목적으로 중앙 재정에 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것이다.)

통영곡을 마련한 방법을 살펴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통영 회부곡은 호조곡을 이전하여 마련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둔전(屯田)의 설치와 곡식의 매입, 그리고 염장(鹽場)·어전(魚箭)을 설치하여 마련하기도 하였다. 회외곡은 충청도의 경우 어염세(魚鹽稅)를 곡물로 바꾸어 마련하였으며, 전라도의 경우 회부곡의 모곡, 즉 이자를 옮겨 만들었다.

삼남의 통영곡은 17세기에 들어서 꾸준히 증가하여 300,000석에 이르렀으며, 18세기 후반에는 한때 400,000석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되던 통영곡은 그 절반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18세기 전반의 경우 총액이 330,000석인데 당시 남아 있던 곡물은 80,000석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당시 전국적인 기근으로 말미암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다수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1759년(영조 35)에는 통영곡이 최고치인 490,000여 석에 달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장부상의 액수가 300,000~400,000석에 이르렀으나 실제 통영곡은 200,000~300,000석 정도가 유지·운영되었다.

이처럼 통영곡은 그 운영에 있어서 부실하여, 장부상에 기록된 액수와 실제 운영되는 환곡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는 흉년 등으로 인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국가에서 탕감(蕩減)해 주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환곡 운영에 있어서 징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곡이라 할지라도 통영의 재정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전액 탕감할 수는 없었다.

1776년 전국 각 기관의 환곡에서 징수하지 못한 비율은 평균 15%로 나타났는데, 통영곡은 23%의 비율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통영곡은 15%를 징수하지 못하여 전국 평균과 일치하지만, 충청도와 전라도는 각각 22%와 33%의 높은 비율을 기록하였다. 이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통영곡 모곡을 경상도의 통영에 옮겨 와 통제영의 비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변천

18세기에는 전국의 환곡 총액이 급격히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통영곡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통영곡이 증가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통영의 재원을 환곡 운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의 통영 재정에서 환곡의 모곡이 전체 통영 수입의 49.2%를 차지하였다.

통영곡 운영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는 통영곡의 모곡을 통제영이 있는 고성까지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운반 비용과 관련해서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통영곡의 모곡을 돈으로 징수하는 방안을 허용하였다. 즉, 18세기 후반 정조대부터 전라도와 충청도의 통영곡 이자를 돈으로 바꾸어 운반하는 이무작전(移貿作錢)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통영곡 모곡의 이무작전을 허용한 이후 다른 기관에서도 이를 전례로 삼아 이무작전을 요구하였다. 이후 환곡 운영에서 곡물 대신 돈을 나누어 주고 가을에 곡물을 받아들이는 전환(錢還)을 시도하는 등 이무작전의 시행은 각종 폐단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정조실록』 2년 11월 20일).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김현구, 「조선 후기 통영곡의 구조와 전개」, 『부대사학』 13, 1988.
  • 김현구, 「조선 후기 통영곡의 운영 실태」, 『역사학보』 124, 1989.
  • 김현구, 「조선 후기 통제영의 재정 운영에 관한 연구: 통영곡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