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一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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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초(哨)로 편성되는 조선후기 군사 편제의 한 단위.

개설

임진왜란 중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를 통해 새로운 전술체계인 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浙江兵法)이 도입되면서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도 크게 변하게 된다. 절강병법에 따르면 1개 영(營) 아래에 5개의 사를, 1개 사 아래에 5개의 초를 두도록 하였다. 1개 사에는 지휘관으로 파총(把摠)을 두었고 신호 등을 담당하는 각종 기수(旗手) 및 취타수(吹打手)를 두었으므로 전체 군사는 600여 명에 달하였다. 수군의 경우에도 2개의 초로 한 사를 편성하였으나 구체적인 편성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시기와 전술의 양상 및 각 군영의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사의 군사 구성이나 규모 등에서는 적잖은 차이를 보이지만, 조선후기 주요한 군사편제의 하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 명나라로부터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제도와 전술인 척계광의 이른바 절강병법이 도입되었다. 절강병법은 총과 장도(長刀)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이 아닌 보병 위주로 짜여진 전술 체계로서, 절강병법의 전술과 군사 편성은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가장 작은 편제인 대(隊)는 대장(隊長) 1인과 군사 10명, 그리고 취사병인 화병(火兵) 1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된다. 3개의 대가 한 기(旗), 3개의 기가 한 초, 5개의 초가 한 사를 이루고, 5개의 사로서 한 영(營)을 편성하게 된다. 수군의 경우에는 육군과 편성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전선 10척 이하 5척 이상을 종(䑸)이라 하였는데 이는 육군의 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초관이 통솔하였다. 또한 두 종을 한 개의 사로 하고 분총(分總)이 통솔하도록 하였다. 조선에서는 분총 대신 파총이 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사의 지휘관은 파총 1인이 있었고 여기에 각종 기수 및 군악, 신호를 담당하는 30여 명의 취타수가 편성되어 있었다. 1개 초의 군사는 정원이 대체로 120명 전후이므로 1개 사는 600여 명으로 편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는 일반적으로 보병의 전술 운용 단위로 사용되었는데 독자적으로 진을 편성하고 전투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다른 사와 함께 운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변천

16세기 중반 명나라에서 『기효신서』가 편찬될 당시 한 사에는 근접전 전문 군사인 살수(殺手)가 4개 초, 조총수(鳥銃手)가 1개 초를 편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전쟁의 양상이 변함에 따라 조총수의 비중이 높아지고 살수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지면서 조총수, 즉 포수(砲手)만으로 사를 편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후기의 주요 군영으로 조선 군사제도의 모델이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경우 17세기 후반인 1682년(숙종 8)의 경우 보병인 보군(步軍)은 좌부(左部)와 우부(右部) 휘하에 각각 좌사(左司), 우사(右司), 중사(中司)의 3개 사로 구성되었다. 지휘관인 파총은 종4품의 무관으로 임명하였다. 좌사와 우사는 포수 5개 초로, 중사는 살수 3개 초로 편성되었는데 좌사와 우사는 군사 565명, 중사는 342명이 정원이었다. 또 다른 도성 수비 군영이었던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은 1682년 군제 개편 이후 보병으로 번상하는 향군(鄕軍)의 경우 살수가 없이 전원 포수로 구성되었으며 전·후·좌·우부의 4부에 각각 5개 사를 편성하였고 각 사는 5개 초로 조직하였다. 각 초의 정원은 127명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 『기효신서(紀效新書)』
  • 『병학지남(兵學指南)』
  •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 『병학통(兵學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혜안, 2001.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 노영구, 「선조대 기효신서의 보급과 진법 논의」, 『군사』34, 1997.
  • 노영구, 「『병학지남』에 나타난 조선후기 수군의 전투 훈련」, 『문헌과해석』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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