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후(虞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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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부장(副將)으로 절도사(節度使)를 대리하거나 돕는 서반(西班) 외관직(外官職).

개설

1466년(세조 12)에 도진무(都鎭撫)를 우후(虞候)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우후는 각 도의 육군·수군 최고 지휘관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부장직(副將職)이었으며 아장(亞將)이라고도 불렸다. 우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절도사가 사정으로 자리를 비울 때 그를 대신하여 도내의 군사 업무 전반을 관장·처리하는 것이었다. 또 우후는 평상시에 절도사를 도와 각종 사무에 참여하였고, 독자적으로 각각의 진을 순시하면서 군사에 관한 제반 사항을 점검하였다. 8도에 모두 우후를 두었던 것은 아니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육군과 수군별로 설치되었다.

담당 직무

각 도의 육군과 수군 주장(主將)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부장으로서 아장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에 들어와 지방 군제가 개편되면서 도별 최고 지휘관으로 도절제사(都節制使)를 파견하였다. 더불어 그를 수석 보좌하는 역할로 도진무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1466년 육군과 수군 모두에 걸쳐 사령관의 명칭을 도절제사에서 절도사로 바꾸면서 도진무를 우후로 고쳤다. 육군의 경우 병마우후(兵馬虞候), 또는 병우후(兵虞候)라고 하였으며 종3품이었다. 수군은 수군우후(水軍虞候), 수우후(水虞候)로 정4품이었다.

육군·수군 모두 우후는 절도사 휘하의 제2인자로서 절도사에게 사정이 생긴 경우 절도사를 대신하여 도내 군사 업무 전반을 관장·처리하였다. 이것이 우후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예컨대 중앙에서 군대 동원 명령이 내려올 때 이를 확인하는 장치로 발병부(發兵符)를 이용했다. 그런데 만약 절도사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재중이라면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절도사를 대신하여 우후가 발병부를 관리하였다.

절도사가 있는 경우에도 우후는 나름의 임무를 맡아서 수행해야 했다. 절도사를 돕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도내의 군사 거점지에 설치된 각각의 진(鎭)을 순시하면서 제반 사항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각종 군사 관련 조치들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 훈련이 규정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무기들은 격식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따위를 살펴보아야 했다. 아마도 수군에서는 전함의 상태에 대한 조사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량이나 군수 물자의 간수에도 간여하였다. 또한 중앙이나 절도사의 명령이나 지시가 확실히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열해야 했다.

한편 지방의 군사는 병영과 수영별로 그에 소속된 우후와 군관 가운데 한 사람이 거느리고 와서 번상(番上)하였다. 정해진 번상 일수에 미달되는 자는 날짜를 계산하여 추가로 번상하게 했다. 우후는 번상과 관련해서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방에서 무반·군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시험 가운데 하나인 도시(都試)의 경우 병마절도사가 서울의 예에 따라 시험을 보아 사람을 뽑은 후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도의 수령·우후·만호 및 그 자제는 모두 그 도내에서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시험의 공정성을 기약하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로써 우후가 도시에도 간여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변천

『경국대전』에 의하면 병마우후의 경우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도, 영안북도에 각각 1명씩 두었다. 도의 형세가 미약하거나 국방상 주요 지역이 아닌 경우에는 병마우후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수군우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에 각각 수군우후 1명씩을 두었다. 이처럼 수군우후의 경우 하삼도(下三道)에만 설치되었는데, 그 밖의 도에는 수군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병마우후는 종3품, 수군우후는 정4품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며, 근무 일수 720일이 차면 교체되었다. 무과(武科) 급제자나 하번(下番) 중인 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 등으로 임명되어 각 진에 배속돼 진장(鎭將)을 보좌 또는 수행하고 군사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던 군관이 평안도와 영안도의 우후에게는 특별히 배당되었다. 두 도의 우후가 담당했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설치 지역과 품계에 변화가 생겼다. 우선 『속대전』에서는 영안도라는 명칭을 함경도로 바꾼 뒤 함경남도에 우후 1명을 더 설치했다. 그리고 경상도에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설치하고 그 휘하에 통우후(統虞候) 1명을 정3품으로 두면서 종전의 경상우도우후를 겸하게 했다. 이는 하삼도의 수군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였다.

다시 국방에 대한 상황이 바뀌면서 『대전회통』에 이르러 우후에 대한 규정이 변경되었다. 먼저 황해도에 종3품 병마우후 1명, 정4품 수군우후 1명을 새로 설치하였다. 서울 주변의 방위력을 증강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경상도의 통우후는 중군(中軍)으로 승격시키고 종2품이 되게 했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우후는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시켰다. 동시에 그들의 근무 경력도 영장(營將)의 경력과 같은 것으로 인정해주도록 했다. 육군·수군에 걸쳐 중요 거점 도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단행했던 것 같다. 이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달리 도마다 우후의 품계에 차이가 있게 되었다.

맡은 일도 약간의 차이가 생겼다. 『속대전』에 따르면 하삼도에서 올라오는 조운선(漕運船)은 충청도에 있는 원산(元山)과 안흥(安興)에서 반드시 점검을 받아야 했다. 조운선이 원산에 이르면 그곳 차사원(差使員)에게, 그리고 안흥에 정박하면 첨사에게 점검을 받아야 했다. 만일 두 곳에서 점검을 받았다는 첩문(帖文)이 없는 경우에는 비록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더라도 감색(監色) 이하의 관련자 모두가 처벌을 받았다. 이때 원산차사원은 충청도수군우후의 겸직으로 정해졌다. 즉, 우후가 군사가 아닌 조운하는 일에도 간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민현구, 『조선 초기의 군사 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軍制史):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軍制) 연구』, 단국대학교, 1973.
  • 오종록,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상)」, 『진단학보』 59,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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