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파(水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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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오고 감[水破]을 말하며, 이에 따라 터의 길흉이 달라진다고 주장되는 것.

개설

산속에서 나와 산속으로 흐르는 물을 이르는 득수득파(得水得破)의 줄임말이다. 풍수설에서는 산수의 형상을 보고 그 길흉을 판단한 후, 수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수파설로 터를 잡는데 활용하였다. 조선초기 계룡산 천도론(遷都論)이 좌절된 것도 수파설에 기인한 것인데 수파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사용한 것은 『지리신법(地理新法)』의 수파설이다. 그런데 『지리신법』의 수파설은 당시의 풍수사들이 주장하는 수파설에 부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내용 및 특징

득(得)은 물을 얻는다는 뜻이고, 파(破)는 물을 보낸다는 뜻이다. 즉 득이란 혈처에 들어오는 물 혹은 그 발원지를 말하고, 파란 혈처를 지나서 수구로 빠져나가는 물 혹은 그 수구처를 말한다. 풍수 좌향론에서 물의 오고가는 방위에 따라 그 길흉이 달라짐을 이야기할 때 근거로 삼는 것이 수파이다. 이 수파설은 풍수 서적마다 그리고 풍수사마다 다양한 이론이 있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수파를 이야기할 때는 특정 풍수서, 즉 『지리신법』을 근거로 한다. 『지리신법』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지리학 시험과목이었기 때문에 『지리신법』의 수파설은 조선조에 국가에 의해 공인된 이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의 오고 감의 방위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이 오는 방향과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과의 각도 관계를 미리 전제한다. 물은 그 흘러오는 방향은 좋은 방위가 되어 좋은 기를 가져다주고, 물이 빠져나가는 방위, 즉 수구(水口)는 나쁜 방위가 되어 나쁜 기를 쓸어 가 버리는 지형지세가 되어야 좋은 땅이라는 것이 『지리신법』의 주장이다. 난해한 이론이기 때문에 수파설은 이후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였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지리신법』의 수파설은 산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음(陰)에 속하며, 물은 움직이므로 양(陽)에 속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은 변하지 않으므로 체(體)가 되지만 물은 변화하기 때문에 터의 길흉은 바로 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리신법』의 핵심 주장은 물은 좋은 방위에서 들어와[得水] 나쁜 방위로 빠져나가야[得派] 한다는 것이다. 즉 수파장생은 길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물이 빠져나가는 방위가 길하다면 『지리신법』에서 물은 나쁜 방위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이론에 부합하지 않아 나쁜 땅이 된다. 조선 건국 직후 1392년(태조 1)에 태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공사를 진행할 즈음, 하륜(河崙)이 계룡산 터는 수파장생이어서 그 쇠패할 땅이라고 말한 것도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그러나 『지리신법』의 이론이 난해하기 때문에 수파설은 이후에도 잘못 이해되어 혼란을 야기하였다. 심지어 선조 때의 대신 정구(鄭逑)는 『지리신법』을 중국이 오랑캐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멸만경(滅蠻經)이라고 비판하기까지 이른다. 실제로 『지리신법』의 수파설로 계룡산 도읍지를 철회시킨 하륜도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이 아니었다. 하륜의 상소문을 보면 계룡산 도읍 예정지의 경우 산이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간다고 하였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따라서 건방의 대오행에 따라 금국이 된다. 금산(金山)일 경우 물의 빠져나가는 방향이 손방일 때, 『지리신법』의 이론에 따르면 탐랑(貪狼)이며 동시에 포태법으로 양(養)에 해당된다. 탐랑 가운데 탐랑 양과 탐랑 장생을 혼동함이 확실하지만 장생 탐랑과 양 탐랑 모두 불길한 터인 데다가 장생과 양이 바로 붙어 있기 때문에 그 혼동을 후세인들이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계룡산의 경우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손방이므로 장생(長生)이 아니라 양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해방 이후까지 아무런 지적 없이 풍수학계뿐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 따라서 계룡산의 경우 수파장생이 아니라 수파양이 되어 불길한 땅이 된다고 해야 정확하다.

변천

『지리신법』의 수파설은 고려시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고, 조선 건국 후에야 쓰였다. 『고려사』에 전혀 언급이 없거니와, 1600년(선조 33) 병조 참판 한준겸(韓浚謙)이 선조에게 고려에서는 수파를 따지지 않고 썼는데, 조선에 행해짐으로써 풍수에 구애되어 폐단이 만연하여 지식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언술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수파설이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선조실록』 33년 7월 26일). 이 수파설은 조선전기에 왕릉 입지 선정에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지만 정확한 방위 측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논란과 혼란을 제공한다. 조선후기에는 『지리신법』의 수파설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 대신 새로운 수파설이 민간에 유포된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호순신 저·김두규 역해, 『지리신법』, 비봉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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