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방(分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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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평안도와 함경도 연변 지역의 진(鎭)·보(堡)에 군사들을 나누어 방수(防戍)하게 하던 일.

개설

평안도와 함경도의 연변(沿邊) 지역은 국토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어 국경 방어의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갑사(甲士)는 6개월 동안 복무하면 2년 6개월 이후에 다시 복무하고[分五番 六朔相遞], 유방정병(留防正兵)은 1개월 동안 복무하면 4개월 후에 다시 복무한다[分四番 一朔相遞].’는 『경국대전』, 「병전(兵典)」, 「번차도목(番次都目)」의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진족이 침입할 우려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 압록강과 두만강의 강물이 얼었을 때 여진족이 침입할 가능성이 가장 많았으므로 연강(沿江) 제진(諸鎭)의 방비를 겨울철 동안은 집중적으로 강화하여야만 했다. 따라서 도내의 전 군사를 자기 소속 진(鎭)의 복무와는 상관없이 겨울철 연강(沿江) 제진(諸鎭)에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부방(赴防)하게 하는 응급적인 조처가 취하여지고 있었다. 이에 때로는 ‘합방(合防)’이라 하여 분번(分番)함이 없이 도내 군사의 전부를 투입하거나, 혹은 ‘분방(分防)’이라 하여 도내 군사를 몇 그룹으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입방(入防)하게 하였던 것이다.

내용 및 변천

평안도와 함경도의 연변 각 진은 다른 진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방비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 진관체제의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여진족의 침입이 예상되는 등 방비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경우 자기 진의 군사의 번수(番數)를 줄여 당번 인원을 늘리는 방법이 첫 단계로 취하여졌다. 그러나 예상되는 여진족의 침입이 자체 진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클 경우 다른 진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475년(성종 6) 8월 평안도순찰사(平安道巡察使)로 파견된 어유소(魚有沼)의 「재거사목(䝴去事目)」에 “황해도 군사 및 평안도 내지(內地) 군사를 제진(諸鎭)·제보(諸堡) 및 신설(新設) 목책처(木柵處)에 적절하게 나누어 방어하라”라는 규정이 있다(『성종실록』 6년 8월 6일). 이러한 방비 상태는 이후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에 1478년(성종 9) 6월 매년 합방으로 평안도 군사가 휴식할 겨를이 없어 피폐가 심하므로 합방을 중지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합방과 분방의 편부(便否)를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합방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군사 및 황해도 군사를 한꺼번에 부방시켜 휴식 기간 없이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이며, 분방은 군사를 몇 그룹으로 나누어 부방과 휴식을 교대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때 정부 내에서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금년은 (여진족의 침입이 있다는) 소식이 있으므로 그 전처럼 합방하라(『성종실록』 9년 6월 4일).”는 전지(傳旨)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479년 8월 합방으로 인하여 군사의 피폐가 너무 심하므로 지금부터는 양번(兩番)으로 분방하게 하고 긴급할 때에는 절도사(節度使)가 우선 합방 조처를 취하고 나중에 조정에 알리도록 하자는 병조의 건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방 조치가 내려졌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듬해인 1480년 7월 병조에서 외침의 우려가 있다며 다시 합방을 건의하였다. 이와 같이 평안도와 함경도의 연변 각 진에서의 합방과 분방 논의는 여진족의 침입과 관련하여 계속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