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상(羅漢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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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羅漢)을 조각 또는 그림으로 나타낸 것.

개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Arha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나한에 대한 개념은 불교 초기부터 형성되어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처음 결집을 행한 제자 500인을 500아라한이라고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의 나한상(羅漢像)은 나한의 모습을 형상화한 모든 종류의 미술품을 의미하나 미술에서는 주로 조각상을 뜻한다. 16나한상, 18나한상, 500나한상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6나한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가장 많이 조성되었다.

나한상은 모습에 대한 일정한 도상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 미술 가운데 제작자의 창의성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소재였다. 중국에서 처음 나한상이 조성되기 시작할 때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등의 제자상, 승려 초상, 생존해 있는 승려의 모습 등이 나한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나한상은 제작 재료와 기법, 제작 장소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연원

석가모니 생존 시부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모두를 아라한이라고 지칭하였으나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중국 당(唐)나라의 현장(玄獎)이 654년에 『법주기(法住記)』를 한역(漢譯)하면서부터이다. 이 책은 석가모니 사후 800년경에 난제밀다라 아라한이 저술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가 16인의 아라한에게 자신의 열반 후에도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무르며 각지에서 불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제도하라고 한 내용이 나온다. 이 16나한이 각 500명에 이르는 권속과 함께 수미산을 비롯한 각 지역에 주석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소승불교 최고의 성자 아라한은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 나한의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중국에서 나한 신앙이 유행하면서 나한상이 조성된 시기는 당말오대(唐末五代)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나한상으로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54굴에서 가져온 소형의 나한상이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006년에 편찬된 황휴복(黃休復)의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에 나한도(羅漢圖)로 유명한 화가인 장현(張玄), 관휴(貫休) 등의 활동 시기도 모두 당말오대이다.

북송(北宋)대에는 가뭄이나 홍수가 날 때 나한상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 성행하였으며 관휴의 16나한도가 유명하여 모사본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남송(南宋)과 금(金)으로 내려오면서 나한 신앙의 대중화와 더불어 나한상 제작이 많아지자 다소 섬약하고 세속화된 경향을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명나라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나한상들은 인간미가 넘치는 부드러운 표정의 나한상, 관휴풍의 나한도, 북송대 문인 화가 이공린풍의 나한도, 산동·하북 지방에서 유행한 사실적인 나한상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및 특징

(1) 조선시대 이전

우리나라에서 나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에 수로왕이 왕궁을 짓기 위해 경상남도 김해평야 지대의 신답평(新畓坪)을 돌아보며 16나한이 상주할 만한 땅이라고 언급한 것과 강원도오대산(五臺山)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 500나한화상(羅漢畵像)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통일신라 이전에도 나한에 대한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나한 신앙이 정착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참여한 나한재(羅漢齋)가 국가적 차원에서 자주 거행되었으며 평양의 보제사(普濟寺)에는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당이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나한재는 고려시대에 개설된 수많은 불교 의례 중 26회나 개설되어 8번째로 많이 개설된 의례였다. 나한상 봉안은 주로 국왕의 장수, 기우제, 변경(邊境)의 환란이 없어져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한 구난(救難)의 목적이었다.

천안 성불사(成佛寺) 나한상은 바위에 부조로 조각된 마애불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16나한 모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감실(龕室) 속에 앉은 모습, 턱을 괸 자세의 모습에서 북송대 절강성 지역 나한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청자로도 제작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나한상과 전라남도 함평 용천사(龍泉寺)에서 출토되어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청자나한상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 속에도 나한 신앙은 왕실 추복(追福)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태조는 원찰인 함경도 안변석왕사(釋王寺)에 500나한을 봉안하고 나한재와 시왕재를 개설하였으며 정종은 경기도 장단의 화장사(華藏寺)에 500나한상을 만들어 봉안하면서 내탕(內帑)에서 재물을 지원해주었다(『정종실록』 2년 3월 8일).

세종대에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며 36개의 지정 사원 이외의 사찰은 폐지되었는데, 이때에도 도성 안 인왕동(仁王洞)에는 나한당이 개설되었고 문종대에도 선왕의 후궁들이 거쳐하던 자수궁(慈壽宮)에 나한전이 지어지는 등 조선전기의 나한 신앙은 왕실 구성원의 장수와 추복, 극락왕생을 비는 기능으로 성행하였다.

조선전기 대표적인 나한상으로는 강원도 영월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출토된 석조 500나한상, 1516년(중종 11)에 제작된 실상사(實相寺) 서진암(瑞眞庵) 석조나한상,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토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나한상 등이 있다. 조선전기 나한상은 지장보살상이나 승가대사상에서 익숙한 머리에 쓰는 두건인 피모(被帽)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주 불회사(佛會寺) 500나한상에는 호랑이와 용과 같은 동물이 함께 표현되었다. 이는 중국의 영향으로 복호나한(伏虎羅漢), 항룡나한(降龍羅漢)을 상징한다. 항룡나한은 가뭄이 들 때 신통력으로 비를 다스리는 신룡을 항복시켜 비를 내리게 한다는 중국 민간 토속 신앙이 수용된 것이다. 재질에 따라 석조상은 비교적 단순하게 조형되었으며 금동이나 소조상은 사실적으로 표현된 나한상이 많은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3) 조선후기

조선후기에는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찰이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영산전(靈山殿) 등을 지어 주로 16나한을 도상화한 나한상과 나한도를 봉안하였다.

이 시기 조성되어 전각에 봉안된 목조 16나한상들이 오늘날까지 봉안된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전라북도 전주송광사(松廣寺), 전라남도 강진정수사(淨水寺), 경상남도 고성 옥천사(玉泉寺) 16나한상이다.

전주 송광사 16나한상은 1656년(효종 7)에 조성되었는데 해학적인 표정과 몸동작, 가사와 장삼 등의 복식 표현 등에서 명대 나한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정수사 16나한상은 조선후기 조각승 색난(色難)이 1684년(숙종 10)에 제작한 것으로 채색을 다시 하여 원래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둥근 내의 깃 밑으로 장삼의 깃이 사선을 이루고 있는 착의 형식에서 조선후기 나한상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 나한상들은 주로 목조로 제작되었으며 왼쪽에 홀수 서열의 나한이, 오른쪽에 짝수 서열의 나한이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
  • 『불설아라한구덕경(佛說阿羅漢具德經)』
  • 정병삼, 「고려와 조선시대의 나한신앙」, 『구도와 깨달음의 성자, 나한』, 국립춘천박물관, 2003.
  • 최성은, 「우리나라의 나한 조각」, 『구도와 깨달음의 성자, 나한』, 국립춘천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