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당(彌勒堂)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27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미륵상을 봉안한 전각.

개설

미륵은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음역으로, 미륵불은 석가여래가 입적한 뒤 지상에 강림[下生],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진 미래불을 말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아직은 미륵보살의 신분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수행 중이며, 내세에 지상에 하생하여 석가여래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고 한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불교 수용 초기부터 각광을 받았다. 미륵보살이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삼국시대에 특히 많이 조성된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백제에서는 미륵사·미륵불광사 등의 절을 창건하였으며, 신라의 경우에도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 법당의 주불(主佛)이 미륵불이었다. 미륵신앙은 화랑도의 성립과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세에 미륵불이 강림하여 이룰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희망의 신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신앙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곳곳에 불상과 보살상이 조성되었다. 사람들은 사바세계를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사찰의 전각보다는 늘 마주할 수 있는 산과 들, 논두렁 등에 조성하였다.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큰 눈과 큰 귀를 새기고 몸통의 형상만을 만들어 미륵불이라 불렀다. 마치 장승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백성들의 눈에는 현실의 고통을 제거해 줄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여기에 번듯한 전각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기둥과 지붕만을 세우고 얹은 뒤 이를 미륵당(彌勒堂)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미륵당이라는 이름을 지닌 전각이 여러 지역에 있었다. 각종 문헌에는 대체로 세 지역의 미륵당이 자주 등장하는데, 평안도 의주와 수원, 한양 홍제원의 미륵당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의주의 미륵당은 바닷가에 인접한, 국방의 중요한 요새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여러 지리지에서 요해처(要海處) 또는 관방(關防) 지역에 관한 설명과 함께 자주 언급되었다.

홍제원의 미륵당은 1451년(문종 1) 무렵에 생겨났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홍제원 석불이라 불리는 미륵불이 있었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공양미를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매일 1,000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당시 예조 정랑황효원(黃孝源)이 이곳에 미륵당을 짓고, 미륵당에 모인 곡식을 한증군인(汗蒸軍人)에게 공급하는 비용으로 쓰기도 했다(『문종실록』 1년 3월 13일).

수원의 미륵당은 과천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건립하였다. 이후 정조는 현륭원에 분향하기 위해 자주 행차하였는데, 1789년(정조 13)에는 행차의 편의를 위해 미륵당에 역원(驛院)을 설치하여 잠시 쉬는 곳으로 삼았다(『정조실록』 13년 7월 13일). 1794년(정조 18) 1월 15일에도 정조는 현륭원을 찾아 분향하였는데, 돌아가는 길에 미륵당 고개[彌勒堂峴]에 이르자, 정조는 "언제나 현륭원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발걸음이 더디어지고, 배양재[陪養峙]를 지나 미륵당 고개에 이르면 저절로 고개를 들고 서성거리게 된다."며 아쉬워하였다(『정조실록』 18년 1월 15일). 그래서 오늘날 이곳을 정조의 ‘걸음이 더뎌진 곳’이라는 뜻에서 지지대(遲遲臺) 고개라고 부른다. 행정 구역으로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일대인데, 원래는 미륵당 고개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주강현, 『마을로 간 미륵』1·2, 대원정사, 1995.
  • 이정일, 「정조의 현륭원 조성과 "남산밑 차씨 집안"의 대응」, 『경기사학』9, 경기사학회, 2005.
  • 한영우,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 『민족문화』23, 한국고전번역원,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