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원(密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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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을 외우며 기도하는 총지종의 승려.

개설

총지종(摠持宗)은 신라시대 명랑(明朗)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나 혜통(惠通)의 총지법(摠持法)에서 발전하여 고려시대 초기에 성립한 밀교(密敎) 계통의 불교 종파로, 조선시대 초기까지 존속하였다. 종파의 특징이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06년(태종 6)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그 종파명이 등장한다. 총지종의 승려인 밀원(密員)은 방술(方術)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 1418년(태종 18)까지 국가로부터 직책을 하사받았다.

내용 및 특징

밀원은 밀교 계통의 종파인 총지종의 승려로, 방술로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국가로부터 직임을 부여받았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1418년부터는 직임을 받지 못하였다.

‘총지(摠持)’는 산스크리트어 ‘다라니(dharani)’를 번역한 말로, 진언(眞言)보다 긴 구절을 의미한다. 진언이나 다라니는 모두 석가모니의 깨달음 그 자체를 언어로 표현한 비밀스런 가르침이다. 이 비밀스런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7세기경 인도에서 발전한 밀교이다. 인도 불교는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가르침을 전파하던 초기 불교 이래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밀교 등으로 발전하였다. 부파불교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약 100년이 지났을 무렵,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초기 불교가 여러 교단으로 나뉘었던 시기의 불교를 말한다. 대승불교는 기원 전후에 등장하여,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 폄하하고 지나친 학문적 태도와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석가모니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7세기 이후에는 기존의 대승불교를 현교(顯敎)라 비판하고, 자신들의 불교는 부처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수하는 비밀 불교 즉 밀교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현재의 몸 그대로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삼밀수행(三密修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밀수행은 신밀(身密)·구밀(口密)·의밀(意密) 등을 말하는데,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됨으로써 해탈(解脫)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수행법이다. 즉 몸으로는 바른 자세를 취하고, 입으로는 진언 다라니를 외우며, 마음으로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 이때 그 소리의 파장이 몸과 마음에 퍼지면서 점점 고요해지고, 의식은 차츰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점점 시간이 흘러 ‘나’와 소리가 하나가 되고, 나도 사라지고 소리도 사라져 삼매(三昧)에 들게 되면 궁극의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 순간 진언의 여러 가지 공덕이 생겨나고, 세속적인 소원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또 진언 다라니를 암송하여 지혜의 세계가 열리면 들리는 모든 소리가 진리를 나타내는 소리가 되고, 내가 하는 말이 모두 부처의 진실어가 된다. 이때에는 일체의 언어와 행동이 완성된 자기표현이 되고, 그 표현이 나의 모범이 되어 공덕이 이 세상에 두루 미치므로 곧 부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에 명랑이 문두루비법으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쳤다거나 혜통이 병을 다스리기 위해 다라니를 암송하는 총지법을 사용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신라시대에 이미 밀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신인종(神印宗)과 지념업(持念業) 등의 종파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신인(神印)’은 산스크리트어 ‘무드라(mudra)’ 곧 문두루를 번역한 말로, 신인종은 명랑의 문두루작법에서 발전하여 936년(태조 19)에 현성사가 창건되면서 종파로 성장하였다. 문두루도량은 문종·숙종·예종·고종 연간에 총 9차례 개설되었다. 지념업은 고려시대 말기에 최자(崔滋)가 쓴 교서 가운데, 지념업 선사 조유(祖猷)가 총지의 법력(法力)으로써 학질과 역병을 몰아냈다고 한 기록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1406년에 억불 정책을 시행하면서 11개의 불교 종파만을 공인하였는데, 이때 총지종과 함께 신인종도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조선초에는 밀원이 궁궐에 들어와 진언을 외우는 제도가 있었다. 총지종의 승려 10명이 교대로 삼전(三殿)에 들어가 진언을 외우고,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는 승려의 진언 의식을 통해 악귀를 쫓던 고려 왕실의 풍습이 그대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01년(태종 1)에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태종실록』 1년 5월 26일).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연구』, 불광출판부, 1994.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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