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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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뜻을 나타내고 공적을 기록하는 기능을 지닌 문체.

개설

명(銘)은 잠명체(箴銘體)에 속하는 문체이다. 잠문은 규계(規戒)의 뜻을 표현하는 문체인 데 비해, 명문은 경계의 뜻을 나타내고 공적(功績)을 기록하는 기능을 지닌다. 명문은 기물(器物)이나 비석에 새겼는데, 처음에는 기물 위에 기명, 물주명, 기물의 제작자, 제작 시기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유협이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말한 것처럼, 기물과 그 명칭을 상응시키는 정명(正名), 기물의 기능을 살피는 심용(審用)까지 더하여 기록했다. 그 뒤 명문은 경계의 뜻을 나타내고 공적을 기록하는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은나라 탕왕(湯王)은 대야에 "진실로 나날이 새로워져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지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명문을 새겨 두었다. 주나라 무왕은 앉은 자리의 전후좌우에 명을 새겼으므로, 흔히 그것을 「석사단명(席四端銘)」이라고 부른다. 공덕을 기록하는 명문도 일찍부터 존재했다. 주나라의 태사(太師)여상(呂尙)이 제(齊) 땅에 봉해졌을 때, 곤오(昆吾)는 그의 공훈을 금판(金版)에 새겼다고 한다.

내용 및 특징

명문은 어디에 새겼는지에 따라 기물명(器物銘), 거실명(居室銘), 산천명(山川銘), 비명(碑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기물명은 활·검·수레·배 및 일상 용구에 새기는 명문을 가리키고, 거실명은 대문이나 방벽 위에 새기는 명문을 말한다. 산천명은 명산대천이나 명승고적에 새기는 명문을 가리키고, 비명은 비석에 새기는 명문이다. 좌석 가까이에 새겨 두고 스스로 경계로 삼은 명은 좌우명(座右銘)이라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최원(崔瑗)은 형 최장(崔璋)이 피살되자 그 적을 칼로 찌르고는 도망했다가 사면된 뒤 스스로를 경계하려고 명을 지어 좌석 우측에 두었다고 한다. 좌우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명은 압운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선진시대 명의 경우에는 압운하지 않은 예도 있다. 한나라 반고의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은 소체(騷體)를 사용하여 압운했으나, 채옹의 「정명(鼎銘)」은 압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츰 4언을 사용하고 압운을 하게 되었다. 당송(唐宋)시대에 이르러서는 운문과 산문이 결합되어, 일반 산문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도 생겨났다. 소식의 「구성대명(九成臺銘)」은 운자가 거의 없고, 장단의 구가 교차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사시에서 명을 시험하였으므로(『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11월 19일), 선비들은 이 문체를 중시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과거 시험과는 별개로, 자신의 정신 지향을 드러내는 문체로 명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명을 즐겨 지었다. 조선시대 전기의 김시습은 「남명(南銘)」과 「북명(北銘)」을 남겼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 권필(權韠)은 "나의 밭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나의 천성을 지키고 나의 연수(年壽)를 마친다."는 내용의 「사오당명(四五堂銘)」을 짓고, ‘사오(四吾)’라는 당호를 썼다. 이후 숙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사오당명」을 부연하여 ‘십오(十吾)’라는 당호를 사용하고, 그 사실을 오언율시 10수로 밝혔다. 영조는 권필과 남용익의 것을 조정하여 ‘육오당(六吾堂)’을 칭했다. ‘나의 밭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나의 책을 보고 나의 잠을 편안히 자며 나의 본분을 지키고 나의 연수를 즐기는 일’을 육오(六吾)라고 한 것이다. 한편 정조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오재순(吳載純)은 만년인 1791년(정조 15)에, 40년 동안이나 사용해 왔던 석우(石友), 즉 벼루에 명을 새겼다. 총 60자로 된 이 명에는 자신의 성, 휘, 작호, 생년 및 학문 연찬 사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수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