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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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출판이나 판매 또는 독서를 법적으로 금지한 책.

개설

책의 출판과 보급, 활자 제작 등을 관리했던 조선 왕조는 때때로 특정한 책의 발간과 유통을 금지하였다. 금지 대상은 주로 조선의 국가 이념인 유교 사상에 어긋나거나 그 권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책들은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불태워졌다. 금서의 역사는 책이 곧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이자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대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내용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금서 관련 사건은 태종 연간에 일어났다. 태종은 정도전·배극렴·조준 등이 조선을 건국한다는 예언을 담은 책을 비롯해 서운관에 소장된 예언서 두 상자를 불태우게 하였다(『태종실록』 18년 3월 24일). 조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예언서가 떠돌았는데, 그 단초는 "삼전삼읍(三奠三邑)이 삼한(三韓)을 멸할 것이다."(『태종실록』 11년 윤12월 25일)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삼전삼읍’은 세 명의 정씨(鄭氏)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이후 ‘이씨(李氏)가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의미의 ‘목자망(木字亡) 전읍흥(奠邑興)’이라는 말로 바뀌어 정감록(鄭鑑錄)사상으로 발전하였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은 다음 해인 1419년(세종 1)에, 『예기(禮記)』와 『춘추(春秋)』 등 유교 경전에 의거해 『장일통요(葬日通要)』라는 장례 관련 서적을 편찬해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와 다른 내용의 책은 잡되고 요망한 글로 치부해 모두 불태우게 했다. 그런가 하면 1469년(예종 1)에는 천문서(天文書)와 같은 책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연산군 때는 언문 금지령을 내리고 관련 서책을 불태웠다. 연산군을 비난하는 괘서와 방문이 곳곳에 나붙고 궁궐에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이들 괘서가 대부분 언문으로 기록된 까닭에 언문으로 된 문서를 모두 불태워 없애고 언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다행히 『훈민정음』 해례본과 『월인석보』, 『용비어천가』 등은 선대왕들이 편찬한 책이라 해서 분서(焚書)에서 제외되었다.

1511년(중종 6)에는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薛公瓚傳)』이 금서가 되었다. 1508년(중종 3)경에 지어진 『설공찬전』이 국문으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읽히는 등 세간에 화제가 되자 나라에서 단속에 나선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윤회화복(輪廻禍福) 사상과 왕을 능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즉시 압수되어 불살라졌으며, 그 작가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하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중종실록』 6년 9월 18일). 이후 소설의 기능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가 주자학과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뒤, 불교와 도교, 서학과 양명학 등은 이단으로 취급되어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와 관련된 상당수의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거나 검열을 당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 왕조는 국가 재건을 위해 성리학적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려 노력하였다. 그에 따라 주자학적 사상 체계에 반기를 들거나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이념과 다른 생각을 펼쳐 보인 인물들을 반국가적 인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취급하였다. 그 결과 허균(許筠)·정인홍(鄭仁弘)·윤휴(尹鑴)·박세당(朴世堂) 등의 저서들은 유포되지 못하고 불태워졌다.

1771년(영조 47)에는 중국의 주린(朱璘)이 쓰거나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명기집략(明紀輯略)』·『봉주강감(鳳州綱鑑)』·『청암집(靑庵集)』 등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가 지은 『강감회찬(綱鑑會纂)』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잘못된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선조는 술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했고, 인조는 왕좌를 찬탈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 조정에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에 따라 주린이 지은 모든 책을 조사하게 하였고, 그가 쓴 문제의 책을 지녔거나 유통시킨 사람들까지 모두 체포해 처벌하였다(『영조실록』 47년 5월 26일).

정조대에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 및 종교 관련 서적 중에 조선 홍문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이때 불태워진 책들은 『척죄정규(滌罪正規)』 등 27종 48책이었으며, 이 중 대부분은 천주교 교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처럼 서학이 금지된 것은 1785년(정조 9)에 추조(秋曹), 즉 형조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 집회를 적발해 낸, 이른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정조는 서학보다 그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패관잡기와 소설 등을 더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1787년(정조 11)에는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이 예문관에서 숙직을 하면서 당송시대의 소설인 『평산냉연(平山冷燕)』 등 청나라에서 들여온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발각되어 시말서를 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켰는데, 이처럼 글쓰기를 통제한 것도 일종의 금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명나라의 문학가 원굉도가 지은 『원중랑집(袁中郞集)』 등 명말 청초의 이른바 ‘양명 좌파’ 도서를 음조가 슬프고 기괴하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순조 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이단 배척 정책을 내세워 천주교도를 탄압했고, 그 결과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조정에서 압수해 불태운 서학 서적이 129종 117권 199책이나 되었다. 또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丁若鍾)이 국내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천주요지(天主要旨)』를 지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그 책은 금서가 되었다. 이후에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 1846년(헌종 12)의 병오사옥(丙午邪獄), 1866년(고종 3)의 병인사옥으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천주교 관련 서적을 회수하고 불태우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1811년(순조 11)에는 홍경래의 난이,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민란 등이 일어났다. 19세기에 이렇듯 민란이 자주 일어나자,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기(秘記)와 도참(圖讖) 관련 서적이 유행했다. 이런 서적들은 모두 금서였다.

또 1860년(철종 11)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교리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이러한 동학 관련 책들은 양반 계급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과 서구 세력에 대항한 민족주의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만큼, 조선시대 후기에 지속적으로 금서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1881년(고종 18)에는 개화를 반대하는 척사(斥邪) 유림들의 주도하에 서양에 관한 내용인 『만국공법(萬國公法)』, 『중서견문(中西見聞)』 등과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등이 금기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18년 2월 26일).

이처럼 조선시대에 금서로 지정된 서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저자와 관련자들이 유배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고, 책들은 불태워졌다. 이 책들은 대부분 정쟁(政爭) 또는 성리학에 위배된다는 사상적 논쟁으로 인해 금서로 지목되었다. 그에 따라 성리학적 가치관에 반하는 도참서·비기·양명학서·서학서 등과, 당쟁 또는 역적으로 화를 입은 사람들의 저서, 명말 청초의 각종 문집, 기타 불경 서적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만큼 성리학의 사상사는 금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영진,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풀빛, 1999.
  • 신양선, 『조선후기 서지사 연구』, 혜안, 1996.
  • 이민희,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 글항아리, 2008.
  • 이중연, 『책의 운명 -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혜안, 2001.
  • 이재정, 『조선출판주식회사』, 안티쿠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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