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악(唐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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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궁중의식(宮中儀式)에 연주하던 속악(俗樂)으로, 전통시대 우리나라에 유입된 중국 음악.

개설

당악(唐樂)은 당나라의 음악이란 뜻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국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특히 당악은 중국 송(宋)나라의 궁중음악 중에서 아악(雅樂)이 아닌 속악(俗樂), 즉 연향음악(宴享音樂)을 의미한다. 당악이란 용어는 당시(唐詩) 대(對) 향가(鄕歌), 당약재(唐藥材) 대(對) 향약재(鄕藥材)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말하는 향악(鄕樂)의 대어(對語)로 쓰여진 말이다.

내용 및 특징

당악은 원래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음악인 향악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당악이라고 할 때는 당나라에서 유래된 음악은 없고, 거의 송나라 사악(詞樂)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현재는 「보허자(步虛子)」와 「낙양춘(洛陽春」의 두 곡만 전승되고 있다.

이들 음악의 악기 편성은 당피리[唐觱篥]를 중심으로 대금(大笒)·당적(唐笛)·해금(奚琴)·아쟁(牙箏)·장고(杖鼓)·좌고(座鼓) 등이 있고, 여기에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이 더해진다.

구성음은 향악의 5음과 다르게 「보허자」의 경우 황(黃)-태(太)-고(姑)-중(仲)-임(林)-남(南)의 6음, 「낙양춘」의 경우 황-태-고-중-임-남-응(應)의 7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악곡은 가사를 지닌 성악곡이다. 이들의 가사는 전단(前段)인 미전사(尾前詞)와 후단(後段)인 미후사(尾後詞)의 2단으로 되어 있다. 음악은 미전사(A·B)를 부르고 미후사를 부를 때는 미후사의 첫 구의 가락만 미전사 첫 구의 가락과 다르게 부르고(C), 둘째 구 이하는 미전사 둘째 구 이하의 가락을 반복한다(B). 즉 ‘A-B-C-B’의 형식을 지닌다. 이때 미후사의 첫째 구를 환두(換頭)라 하고 미후사의 B부분을 환입(還入)이라고 한다.

변천

중국으로부터 당나라의 음악을 들여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우리나라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당악이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이 시기는 당악이 대량으로 수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려 제4대 광종 때 송나라에서 악기가 들어오고, 음악인이 귀화하여 고려 궁중의 음악 기관에서 당악을 연주하였다. 이들의 음악은 향악과 같이 단순한 음악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기악 연주에 맞추어 기녀들이 춤을 추고 노래까지 부르는 일종의 종합 공연 예술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송나라 사악이 들어와 발전하면서 전성을 이루었다.

고려시대 당악은 조선초기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향악을 우방(右坊)이라 한 것에 대하여 당악을 좌방(左坊)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1402년(태종 2)에 제정한 국가적인 연향악(宴享樂)에는 「수룡음(水龍吟)」·「태평년(太平年)」·「금전악(金殿樂)」 등 많은 당악이 채택되었으며, 그 후로도 당악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도 채택되었다. 또한 전정고취(殿庭鼓吹)·전후고취(殿後鼓吹)·행악(行樂)인 전부고취(前部鼓吹)·후부고취(後部鼓吹)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1433년(세종 15)에는 당악곡이 점차 줄어들어 30여 곡이 남았으며(『세종실록』), 1447년(세종 29)에는 12곡(『속악보』), 1471년(성종 2)에는 29곡(『경국대전』), 1759년(영조 35)에는 15곡(『대악전보』)이 남았다. 그리고 그 뒤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는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세종 이후 당악은 좌방의 위치를 중국계 아악에 내놓고, 우방인 향악에 흡수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향악 중심인 우방에 당악이 편입된 후로는 당악도 향악에 차츰 동화되면서 고유의 특징을 잃게 된다. 그 실례로 당악기인 월금(月琴)·해금(奚琴)이 향악에만 쓰이게 되고, 박(拍)·교방고(敎坊鼓)·장고(杖鼓)·당비파(唐琵琶)·아쟁(牙箏)·태평소(太平簫)가 당악과 향악에 사용되게 되었다.

또한 초기 고악보(古樂譜)에 수록된 당악은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으로 향악의 일자다음식(一字多音式)과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간보(井間譜) 4행(行)마다 규칙적으로 박이 들어갔다. 이와 같이 규칙적인 음악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불규칙적인 음악으로 변질되고, 일자다음식의 향악화 과정을 거쳤다. 현재의 당악 역시 조선후기의 향악화된 음악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당악의 향악화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향당교주(鄕唐交奏)에 의해서 더욱 가속되면서 오늘날까지 당악의 음악적 특징이 뚜렷하게 남지 않게 되었다.

의의

통일신라시대에 전승된 당악은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유입된 교방악과 사악을 수용함으로써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고려시대의 당악은 원래 당나라의 음악인 당악과 송나라의 음악인 송악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의 당악은 좁은 의미를 당악이며, 고려시대의 당악은 넓은 의미의 당악이다. 이러한 고려시대 넓은 의미의 당악은 조선시대에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곡은 모두 송나라의 교방 악사들이 고려에 머무는 동안 고려의 악곡과 교방 여기들에게 가르쳐준 공연 종목이기도 하며, 송사의 대곡에 포함되는 포구락(抛毬樂) 등을 포함한 당악정재는 고려 궁중 공연 예술의 백미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를 거쳐서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궁중무용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한 송나라 교방 악사들의 공연 예술사적 공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악원보(俗樂源譜)』
  • 대한민국예술원 편집부, 『한국음악사전』, 대한민국예술원, 1985.
  • 김영운, 『e-국악아카데미 중 우리음악 길라잡이』, 국립국악원, 2008.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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