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룡(幹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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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정맥(正脈)으로 나무의 큰 줄기와 같이 산의 큰 줄기가 되는 용맥.

개설

간룡은 지룡(枝龍)에 상대되는 말로써 나무의 줄기[幹]와 가지[枝]에 빗대어서 표현한 것이다. 즉 간룡은 인체의 척추와 같이 중심이 되는 지맥을 말한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의 중심부를 뚫고 뻗어 내려온 지맥을 받아서 그곳에 입지를 정하면 충만한 생기를 오롯이 받기 때문에 길지가 된다고 본다. 조선왕조에서 궁궐과 능 선정에서 간룡인가 지룡인가를 살피는 것은 생기가 충만하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정도를 중시하는 외에, 종법(宗法)을 중시하는 유교적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내용 및 특징

간룡의 땅은 그 규모에 따라 도읍지, 중소대도시, 마을 혹은 제왕을 있게 하는 혈이 될 수 있다. 간룡과 지룡을 살피는 까닭은 용에 흐르는 지기의 역량을 살피기 위함이다. 간룡과 지룡이 명확해지면 적서(嫡庶)가 분명해지고, 적서가 분명해지면 그 용의 역량이 보인다고 풍수서들은 간룡의 의미를 정리한다.

간룡은 정룡(正龍)이라고도 하는데, 곧고 올바르게 뻗은 줄기로서 정기(正氣)를 받아 나가고 그 곁으로 무리의 산이 조공(朝恭)하고 포위하는 것으로 대개 뭇 산줄기들의 중앙에 위치하여 안정과 조화감을 준다. 그 기세는 생동적이며, 수려하되 웅장해야 한다. 간룡에 터를 잡아야 충신열사, 고관대작, 현인군자, 어진 효자가 나오는 혈이 형성된다고 믿었기에 조선왕실에도 궁궐이나 왕릉 선정에 간룡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33년(세종 15) 최양선(崔揚善)이 경복궁 터가 진혈처가 아니라는 상소를 올려 왕과 대신들, 그리고 상지관들 사이에서 경복궁 진혈(眞穴)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었을 때 그 진혈·가혈을 구분하는 근거가 바로 간룡이었다. 즉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내룡이 간룡인가 승문원(承文院) 터로 이어지는 내룡이 간룡인가에 따라 그 진혈·가혈의 여부가 판가름 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간룡은 길고 지룡은 짧으며, 간룡은 강하고 지룡은 미약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북악산이 간룡이고, 승문원으로 이어지는 지맥은 미약하여 지룡이 된다는 것이 당시 다수 의견이었다(『세종실록』 15년 7월 15일). 조선은 지리의 학설을 외면할 수가 없는 나라이며, 지리를 쓰려면 간룡과 지룡을 알아야 한다는 세종의 말도 간룡을 중시한 면모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7일). 이러한 간룡·지룡 논의는 1464년(세조 10)에 다시 한 번 일어난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간룡과 지룡 개념은 왕릉 선정에서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1445년(세종 27) 헌릉(獻陵) 서쪽에 있는 곳으로 세종의 수릉(壽陵)을 정하고자 할 때 그곳은 간룡이 아니어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문제의 핵심은 대모산 아래 두 개의 간룡이 있을 수 없으므로 두 개의 능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간룡과 지룡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당시 대신들과 지관들은 우의정하연(河演)과 예조 판서김종서(金宗瑞), 그리고 정인지(鄭麟趾) 등이 현장을 답사한 뒤 상서를 올리는데 그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다. 『동림조담(洞林照膽)』「재혈편(裁穴篇)」에 무릇 산머리에서 두 갈래로 내려온 것은 두 머리가 혈이 된다. 대모산의 바른 용이 몸을 헤치고 곧게 내려와서 두 혈을 나누어 만들었으니, 바른 자리와 곁자리의 구분이 없는데, 어찌 낫고 못함을 의논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만약 대모산 주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내룡을 간룡과 지룡으로 나누어버린다면 헌릉이 간룡이 되고 세종의 수릉 터가 될 곳은 지룡이 되어 능을 쓸 수 없다. 그러나 하연과 김종서 등은 헌릉 옆에 세종의 수릉을 만들기 위해서 이곳 대모산 아래에서는 간룡과 지룡의 구별이 없고, 두 개의 맥 혹은 두 개의 줄기가 있어 두 개의 혈이 생겼다는 논리를 편다. 즉 간룡으로 내려온 맥이나 지룡으로 내려 온 맥이나 지맥이 분명하면 쓸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종법 인식을 바탕으로 하거나, 간룡 중심의 판단이라면 헌릉 옆에 세종의 수릉을 쓸 수 없게 된다.

변천

간룡이란 용어는 『인자수지(人子須知)』에서 풍수지리의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큰 맥은 삼대간룡을 중심으로 중국의 형세를 논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풍수지리 술법과 관련된 간룡은 초기에 언급이 되지만 이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도읍풍수나 양기풍수 등에 대한 논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정조 대에 간룡이 언급되지만(『정조실록』 16년 9월 11일), 이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동림조담(洞林照膽)』
  • 『의룡경(疑龍經)』
  • 『지리정종(地理正宗)』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장성규, 『백두대간의 역사』, ㈜한국학술정보, 2008.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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