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릉(睿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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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과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의 능.

개설

철종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이명(李明)의 옥사 때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 그 뒤 1849년(헌종 15)에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德完君)에 책봉되었으며, 다음 날 19세의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였다.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승하하여, 다음 해 4월 7일 고양에 위치한 희릉(禧陵) 오른쪽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장황제(章皇帝)로 추존되었다.

철인왕후 김씨는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8년(고종 15) 5월 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여 예릉의 좌측에 안장되었다. 예릉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해 있는데, 중종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 인종과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의 능인 효릉(孝陵)과 더불어 서삼릉을 이루고 있다.

조성 경위

1863년에 철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을 총호사(摠護使)로 임명하여 국장 절차를 진행하게 하였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 8일). 12월 15일 빈청 회의를 통해 시호를 철종, 능호를 예릉으로 정하였다. 다음 해 정월 25일부터 산릉 공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문인석과 무인석은 가까이 있는 옛 정릉(靖陵)의 것을 사용하였으며, 다른 석물은 1867년(철종 7)에 천장한 옛 인릉(仁陵)의 것을 가져다 썼다. 4월 2일에 정자각 공사를 마치고 4월 6일 발인하여 이튿날 현궁을 내렸으며, 10일에는 모든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였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승하한 지 15년 만인 1878년(고종 15) 5월 12일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고종은 총호사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그달 17일 빈청 회의에서 능호를 헌릉(憲陵)으로 정했으나, 예릉에 쌍릉으로 조성하였으므로 별도로 능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건물과 석물은 기존의 것을 이용했는데, 멀지 않은 명릉(明陵)익릉(翼陵)의 장대석을 가져와 사용했고 장명등은 두 봉분의 가운데로 옮겼다. 문인석과 무인석 등 각종 석물은 세정(洗淨)하였고, 곡장은 왼편을 철거하여 확장하였다. 표석은 기존 표석의 앞뒤를 갈아 낸 뒤 새로 비문을 새겼다.

조성 상황

예릉은 왕릉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두 개의 봉분을 에워싸는 형태로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난간석 기둥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간지 문자를 새겨 넣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각각 1개씩 설치하였으며, 망주석·양석(羊石)·호석(虎石)·문인석·무인석·마석(馬石)·장명등 등의 석물을 배설하였다. 철종 예릉의 비문은 영돈녕부사김흥근(金興根)이 지었다

변천

1908년(융희 2) 5월 11일에 철종을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로 추존하고, 능의 표석을 고쳐 세웠다.

관련 사항

철종이 승하한 뒤 처음 예릉을 조성할 때, 봉표한 자리에서 20자 떨어진 곳에서 문인석 및 무인석, 혼유석, 호석(虎石) 등의 석물과 옥으로 된 애책문(哀冊文)의 조각 등 옛 정릉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에 외재궁 판목 등은 태우고, 애책문 조각은 함에 넣어 정릉의 곡장 밖에 묻도록 했다. 중종의 능인 정릉은 원래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조성했으나, 1562년(명종 17)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 『철종대왕예릉산릉도감의궤(哲宗大王睿陵山陵都監儀軌)』
  • 『철인왕후예릉산릉도감의궤(哲仁王后睿陵山陵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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