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례도감(冊禮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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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또는 왕세자 등 왕실 사람들의 책봉 의례를 주관하던 임시 기구.

개설

책례도감에서 ‘책례’란 책립(冊立) 또는 책봉(冊封)에 따르는 의례라는 뜻이다. 책봉은 ‘책명(冊命)’과 ‘봉작(封爵)’의 합성어이다. 책명은 ‘책으로 명한다.’ 하는 뜻이고, 봉작은 ‘봉토(封土)하고 수작(授爵)한다.’ 하는 뜻이다. 봉작에서의 ‘봉토’는 중국에서 시행되었던 봉건 제도에서 제후의 토지를 분봉한다는 의미이고 ‘수작’은 제후의 등급에 맞는 작위를 수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책례란 중국의 봉건 제도에서 분봉을 통해 제후를 봉건하고, 제후의 등급에 맞는 작위를 책으로 명하는 과정에서 시행된 의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동양의 봉작 제도와 봉건 제도는 역사적 변천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본래 봉작 제도는 중국의 은(殷)·주(周)나라 때 봉건 제후들을 포섭·예우하던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 진(秦)나라 이후 전 신민(臣民)들을 포섭하는 제도로 발전하여 관료 제도와 함께 국가의 2대 통치 기술로 발달하였다.

은·주나라 시대에 시작된 중국의 봉작 제도는 한·당·송·명나라를 거치면서 봉작 제도라는 이름은 그대로 존속하였지만 형식과 기능 면에서는 크게 변하였다. 진·한나라 시대에 황제 체제가 확립되면서 사실상 봉건 제도는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작 제도의 형식과 기능이 어떻게 변했든 상관없이 봉작의 대상자는 왕족과 공신에 한정되었으며 봉작에 수반되는 경제적, 형사적 특권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주나라 때와 춘추시대의 봉작 제도에서는 기내제후(畿內諸侯)를 대상으로 하는 내작(內爵)과, 기외제후(畿外諸侯)를 대상으로 하는 5등작이 있었다. 진한 시대에 들어 기외제후를 대상으로 하던 5등작제가 중국 주변의 국가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로서 조공·책봉 체제가 형성되었다.

중국의 봉건 제도에 입각한 봉작 제도에서는 의례가 매우 중요하였다. 사실상 독립국의 통치자들인 제후들을 평화적으로 연대·협력하게 만든 매개체가 바로 의례화 된 서열로서의 봉작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례』에 수록된 의례 중의 많은 부분이 봉건 제후들의 연대·협력에 필요한 의례였다. 진한 이후 형성된 조공·책봉 체제에서도 의례는 매우 중요했다. 진한 이래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조공·책봉 체제에 필요한 의례를 세밀하게 마련하였다. 왕조례 중의 빈례(賓禮)가 바로 조공·책봉에 필요한 의례였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치자들이 각각 중국에게 왕으로 책봉을 받고 조공을 거행함으로써 조공·책봉 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삼국시대의 통치자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하였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토지의 분봉이 시행된 적이 없었으므로 봉건 제도에 입각했던 은·주 시대의 봉작 제도보다는 황제 체제에 입각했던 당대의 봉작 제도가 주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의 통치자 역시 중국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했다.

조선의 왕 역시 중국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종친, 부마(駙馬), 외척, 공주, 왕과 종친의 배우자 등 왕실을 대상으로 하는 왕실 봉작 제도가 치밀하게 정비되었다. 조선 건국 이전의 신라 왕실, 고려 왕실은 기본적으로 족내혼에 입각하여 구성·운영되었지만 조선의 왕실은 철저하게 이성혼(異姓婚)에 입각하여 구성·운영되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실정에 적합한 왕실 봉작 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책봉 의례에는 중국과 조선 사이에서 시행된 책봉 의례가 있었고, 조선 내부에서 시행된 책봉 의례가 있었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서 시행된 책봉 의례는 이른바 조공·책봉 체제에 입각하여 중국 황제가 조선 왕을 책봉하는 의례였다. 반면 조선 내부에서 시행된 책봉 의례는 조선 왕이 왕실 봉작 제도에 의거하여 왕실 사람들을 책봉하는 의례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책례도감은 임시 기구이므로 필요할 때만 설치되었다. 조선이 건국 후 거행한 최초의 책봉 의례는 왕비와 왕세자 책봉 의례였다. 1392년(태조 1) 7월 17일에 즉위한 조선의 건국 시조 태조이성계는 8월 7일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현비(賢妃)로 하였다. 이어서 8월 20일에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왕비와 왕세자를 책봉하면서 어떤 의례가 거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왕비 책봉 의례와 왕세자 책봉 의례가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책봉 의례를 거행하기 위한 도감이 설치되었는지의 여부 역시 확실하지 않지만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태조실록』에 의하면 1397년(태조 6) 10월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는데, 이때의 가례도감은 혼인을 위하여 설치되었으므로 책례와 관련된 의례도 관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상왕이나 현왕 또는 대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경우 봉숭도감(奉崇都監)을 설치하여 의례를 거행하였는데, 봉숭도감 역시 책례도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또는 의궤 등을 통해 볼 때, 책례도감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확인된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1609년(광해군 1) 10월 27일 자의 예조계사(啓辭)에, ‘책례도감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교명축의 무늬에 대하여 해당 관서로 하여금 속히 고증하여 결정하게 하라 하셨는데 교명축을 만드는 양식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서적에는 증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아울러 현존하는 의궤 중에는 『순치십팔년신축시월초일일책례도감도청의궤(順治十八年辛丑十月初一日冊禮都監都廳儀軌)』, 『왕세자책례도감의궤(王世子冊禮都監儀軌)』 등 상당수의 책례도감 의궤가 남아 있다. 이 같은 조선후기의 책례도감 의궤는 왕비 또는 왕세자 등 왕실 사람들을 책봉하기 위한 책례도감에서 작성한 의궤로서, 조선 건국 이후의 전통이 계승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책례도감의 조직과 역할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도감과 같았다. 조선시대의 도감은 행사의 종류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 예컨대 왕실 가례를 주관하면 가례도감, 왕세자나 왕비 등의 책봉을 주관하면 책례도감, 존호를 올리는 일을 주관하면 진호도감(進號都監), 국장을 주관하면 국장도감, 산릉 조성을 주관하면 산릉도감, 혼전(魂殿)을 주관하면 혼전도감, 부묘(祔廟)를 주관하면 부묘도감이라 하였다.

도감은 행사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본부와 하위 조직으로 구분되었다. 본부는 도청(都廳)이라고 하였으며, 이곳에 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가 근무하였다. 도제조는 정승 중에서 임명되었고, 도제조를 보좌하기 위하여 당상관들이 배속되었다. 도감의 업무는 도청에서 총괄하여 추진하였다. 도청 아래에는 보통 3개의 방을 두어 행사 업무를 분장하였고, 각 방에는 업무를 추진하는 실무자인 낭청과 이들을 지원하는 보조원들이 배속되었다.

도감에는 도청과 각 방 이외에도 종류에 따라 몇 가지 조직이 더 추가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가례나 부묘를 할 때 행사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하고 또 별궁이나 종묘를 수리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 행사에 필요한 부대시설을 담당하는 별공작(別工作)이나, 수리를 전담하는 수리소를 설치했다. 담당 행사가 완료되면 도감은 해체되어 의궤청(儀軌廳)이라는 기구로 바뀌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행사 전반을 관할하던 도청 담당자들이 의궤청에 그대로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행사 중에 작성한 등록(謄錄)반차도(班次圖)를 기초로 의궤를 작성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제후 체제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던 왕실 봉작 제도는 대한제국기에 들어 황제 체제에 입각한 황실 봉작 제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에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황실 사람들의 책봉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도감을 설치했고, 행사 후에는 의궤를 작성하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대한제국 자체의 봉작 제도가 사라지면서 책봉 의례를 거행하기 위한 도감도 설치되지 않았고 의궤도 작성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서울대학교 도서관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1~8』, 서울대학교 도서관, 197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등록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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