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營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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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관찰사·도사 또는 감영·병영·수영 등에 속하여 있던 아전.

개설

영리(營吏)는 조선시대 각 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 또는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 등에 속하여 있던 아전을 가리킨다. 각 영의 영리는 관할 고을의 향리에서 차출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리는 각 지역의 향리 가운데 추천을 받아 「영방선생안(營房先生案)」에 수록한 후 그 중에서 차출하였다.

영리는 전임(前任) 영리와 각 지역의 추천을 거쳐서 「영방선생안」에 수록된 후, 통인(通引)이 되어 글과 초서 등을 익히고, 이어서 공방(工房) 영리, 예방(禮房) 영리 등을 거쳐 이방(吏房) 영리가 되는 것이 최고 출세 코스였다.

조직 및 역할

영리의 직임과 인원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영남 감영의 사례를 보면, 지방의 향리 직임과 마찬가지로 6방으로 분방되어 있다. 영리의 정원은 이방(吏房) 1명, 호방(戶房) 2명, 예방(禮房) 1명, 병방(兵房) 1명, 형방(刑房) 2명, 공방(工房) 1명, 계서(啓書) 4명, 통인(通引) 1명 등 대략 13명 정도였다. 각 고을의 향리 조직과 다른 특별한 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계서영리가 있는 것인데, 계서영리는 그 명칭으로 보아 각 영의 장계(狀啓)를 쓰는 영리로 짐작이 된다.

영리직은 대개 호적 정리, 흉년 진휼(賑恤), 검전경차관(檢田敬差官)의 보조, 암행어사 수행(隨行)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계서영리는 영리 중에서도 글씨를 잘 써서, 정조대에는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篇)』을 베껴 쓰게 하고 잘 쓴 순서대로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9월 3일).

변천

영리의 특권과 병행하여 조선후기 이후에는 감영 영리를 특정 지역의 특정 이족(吏族), 특정 가계가 독점 안배하는 추세가 생겼다. 이에 상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배타적인 통혼권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감영 영리들은 혈연적으로 더욱 밀접한 관계 속에 놓이고 감영의 영방 운영은 더욱 혈연적 결속을 기반으로 운영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 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
  • 김준형, 「조선시대 향리층 연구의 동향과 문제점」, 『사회와역사』27, 1991.
  • 이성무, 「조선 초기의 향리」, 『한국사연구』5, 1970.
  • 이수건, 「조선조 향리의 일연구: 호장(戶長)에 대하여」, 『(영남대학교)문리대학보』3,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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