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당(讀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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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중 재주가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을 닦게 하던 서재이자 관서.

개설

독서당은 조선시대에 젊은 문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게 하던 서재이면서 관서였다. 독서당은 서울의 남쪽 옥수동(玉水洞)·한남동(漢南洞)·보광동(普光洞) 등지 강변의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 있었다.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렸다. 1426년(세종 8)에 처음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두었으며, 1442년에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한 것이 시초였다. 1491년(성종 22) 용산(龍山)에 있는 폐사(廢寺) 장의사(藏義寺)를 수리하여 처음으로 독서당을 두어,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라 하였다. 이후에 옥수동 일대로 옮겨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조선 전기와 중기에 이황·이수광·이산해·유성룡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의 설치로 그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1426년 12월, 젊은 문신 중에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한정되어 독서와 연구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래서 1442년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는 진관사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다. 이 상사독서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 때문에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상사독서는 사찰에서 독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설 국가 기구인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492년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의 주청을 받아들여 현재의 용산 지역에 남호독서당을 개설하였다. 그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폐사를 수리하여 만든 것이었다. 독서당을 호당이라 하였고, 서울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호독서당이라 불렀다. 중종대에는 현재의 옥수동·금호동 일대로 독서당을 이전하면서 동호독서당이라 하였다.

심수경(沈守慶)은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독서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독서당은 세종 때 창설하였는데, 젊은 사람 가운데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 강학에 전념하게 하는 장가독서(長暇讀書) 제도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이로 보아 독서당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서당은 관리들에게 휴식 기간을 주고 독서와 학문에만 전념하게 한 제도로서 현재 관공서나 대학교, 기업체 등에서 진행하는 연구년 제도와 비슷하다.

조직 및 역할

독서당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선발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대제학(大提學)과 예조 판서가 초선(抄選)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는 6인 내외를 선발하였고, 선발 연령은 연소문신(年少文臣)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40세가 넘어서 선발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성옹지소록(惺翁識少錄)』의 “이후백(李後白)이 처음으로 40세가 되어서 들어갔고, 이이첨(李爾瞻)은 48세로 들어갔으니 역시 파격이었다.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그대로 겸무한 자는 박민헌(朴民獻)·이덕형(李德馨)이었다.”는 기록을 통해 40세 이하의 젊은이가 주로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당상관직을 겸무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서당의 인원수는 1426년부터 1773년(영조 49)까지 350여 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그 임명이 가능하게끔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명, 고직(庫直) 2명, 사령(使令) 1명, 군사(軍士) 2명이 있었다. 독서당은 공공업무를 주관하는 관서의 의미보다는 연구 기관으로서 학문적 기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기도 했다. 운영은 국비로 하되, 임금의 특별 배려에 의한 하사품이 운영의 보조 구실을 하였다.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와 우대는 지극하였다. 독서당에는 언제나 궁중 음식 전담 기관인 내자시(內資寺)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임금이 명마(名馬)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안장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

변천

세종은 1426년 사가독서제를 시행하였고, 1442년에는 상사독서제를 실시하였다. 이 상사독서제는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도 실시되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1476년과 1486년에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1492년에는 남호독서당을 개설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1476년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가 어리고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한 채수(蔡壽)·양희지(楊熙止)·유호인(兪好仁)·조위(曹偉)·허침(許琛)·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후에 용산의 폐사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기 때문에 조위에게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이로써 성종대에 본격적으로 독서당 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독서당에서는 1495년(연산군 1)부터 1498년까지 매년 5~6명이 독서하였으나, 연산군 때인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독서장려책을 적극 권장하였고, 독서당제도를 부활시켜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업원이 여염집 사이에 있어 독서에 전념할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이 끊이지 않았다. 중종은 1517년(중종 12)에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각될 때까지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 연구와 도서 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에 대제학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여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사가독서제도가 정지되고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때에도 독서당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는 있으나 재건에 관해서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을 세우면서 완전히 그 기능을 잃었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문선(東文選)』
  • 『견한잡록(遣閑雜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