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포법(戶布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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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를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고자 하는 군역 및 세제개혁 논의, 또는 그 제도.

개설

호포는 반드시 군역(軍役)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나, 조선후기에는 주로 군역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조선후기의 호포법은 군역 대상자나 그 호(戶)에만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호에 고르게 군포(軍布)를 부과하고자 한 군역 변통 방안이었다. 그러나 양반층이 상민과 동등하게 군포를 낼 수는 없다는 반대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숙종대 여러 번 제기된 호포법 논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군역 재원에 관한 논의는 영조의 강력한 의지로 호포와 결포, 2가지 방안 중 하나를 실시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수령의 주도 하에 지방에서 실제로 호포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대원군 집권 하에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는 한편, 신분 상하에 관계없이 호당 2냥씩을 부과하는 제도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필요한 경비나 빈민구제를 위한 물자 마련을 위하여 은이나 미곡을 민간의 호 단위로 징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초에도 요역(徭役)을 질 장정을 동원하는 대신에, 민간의 호를 대·중·소로 나누어 호단위로 포(布)를 징수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함경도의 무격(巫覡)들에게 호포를 징수하여 군대의 물자로 사용하였고, 1601년(선조 34)에는 명의 칙사 접대를 위하여 외방에 빈잔호(貧殘戶)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민호에 호포를 징수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군역은 군호(軍戶)의 편제에 기초하여 부과되었다. 군호는 양인호(良人戶)를 대상으로 하여 실제로 번을 서는 정군(正軍)과 그것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족(奉足)으로 구성되었다. 요컨대 군역은 기본적으로 호를 대상으로 부과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거치면서 군역자가 개별 신역으로 파악되고, 봉족 또한 군포 징수로 전환되면서 군호의 편제는 현실성을 잃어 갔다.

군포 징수와 관련하여 1654년(효종 5)에 영의정김육(金堉)은 직역(職役)이 없는 양반 자제에게 군포 1필을 징수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군포 부담은 양인호에게 균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속되었다. 숙종 즉위 초부터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그 인식은 다시 호포법논의로 전환되었다. “위로는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는 서천(庶賤)에 이르기까지 포를 내지 않는 호가 없도록 한다.”는 원칙 아래, 호포를 징수하여 군수(軍需)를 확충하고 양역을 줄여 주자는 윤휴(尹鑴)의 주장이 그것이었다(『숙종실록』 2년 1월 19일). 이에 호포법 시행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었다. 실제 윤휴의 제안이 이상론으로 민간의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이후로 역종별 군액을 일정한 수로 고정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군적(軍籍)에 기초해서 군역 대상자를 파악하거나 해당 군액을 조절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호에 군역을 고루 할당할 것인지가 논의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관료들은 작은 폐단을 없애려다가 도리어 큰 폐단이 일어날 것이라 하며 호포제 시행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심지어 호포법 시행 논의는 국론(國論)을 분열시킬 것이라며, 호포에 관한 논의를 중지하라고 요청하였다(『숙종실록』 8년 1월 4일).

내용

1677년(숙종 3)에 윤휴는 도망자나 사망자·어린아이에게 포(布)를 거두는 것을 감면하는 일을 신속히 시행할 것을 재촉하면서, 호포를 인구수대로 계산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면 나라의 경비가 풍족해질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며칠 뒤에 부제학(副提學)이당규(李堂揆)도 사망자나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하면 많아도 40,000~50,000명에 불과할 것이므로, 1명당 2필의 베라면 겨우 100,000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록 양민으로서 역이 있는 자, 공천(公賤)·사천(私賤)으로서 공물을 바치는 자, 의지할 데 없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을 계산하여 제외시킨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역이 없이 한가롭게 노는 자는 적어도 200,000호를 밑돌지 않을 것이니, 호마다 1필의 베를 내면 그 수가 배로 될 것이며, 호에서도 해마다 베를 낼 필요가 없고 경비도 자연히 충분해질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숙종실록』 3년 12월 25일).

원칙적으로 모든 양인이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므로 모든 양인호에게 고르게 군포를 부과하는 것이 군역 운영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를 대상으로 포를 징수할 경우에 대호·중호·소호 등으로 호등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호마다의 부담이 균등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호포법 논의는 각종 군문과 관서들이 개별적으로 군역 재원을 확보하려는 활동을 금지하고 군역의 역종별 액수를 고정화하여 군역 징수 체계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호포법은 통치 체제의 집권화 경향에 대한 논쟁거리를 신하들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변천

호포법은 모든 계층에게 군포를 부과하면 소요가 일 것이라는 우려와 흉년을 빌미로 하여 시행을 못하고 있었다. 그 대안으로 모든 인구에게 포를 거둔다는 구포(口布)나 그것을 동전으로 거두는 구전(口錢) 논의가 제기되었다. 1714년(숙종 40)에는 숙종이 호포와 구전 중에서 충분히 강구하고 처리하도록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숙종실록』 40년 9월 21일).

군정의 폐단이 심해지면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호포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호포법의 시행 효과를 어느 정도 반영한 제도들이 생겨났다. 군역에 대하여 지역에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 즉 이정법(里定法)·공동납(共同納)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특히 호수에 기초하거나 호마다 분담하는 방식은 호포제와 다를 바 없었다.

호포법 논의는 이후 영조대에도 이어졌다. 박문수가 주장한 호전론 등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호를 기준으로 균등하게 군포 또는 화폐로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군역 재원에 관한 논의는 영조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여 호포와 결포 2가지로 좁혀졌다. 이후 결포 논의의 연장선에 군포 부담을 1필로 균일하게 감축하고 그만큼의 부족한 군역 수입을 토지에 부과하는 균역법이 성립할 수 있었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문란하였던 환곡(還穀)·전세(田稅)의 개혁과 함께 군정에도 일대 쇄신책을 단행하면서 호포법이 다시 대두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고,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2냥씩을 부과하였다. 이때 양반들의 위신을 고려하여 양반호에 대하여는 호주명(戶主名)이 아닌 하인의 노명(奴名)으로 납입하도록-노명출포(奴名出布)-하였다.

참고문헌

  • 김용섭, 「朝鮮後期 軍役制釐正의 推移와 戶布法」, 『省谷論叢』 제13집, 성곡학술문화재단, 1982.
  • 송양섭, 「조선후기 군역제 연구현황과 과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 지두환, 「조선후기 戶布制 論議」, 『韓國史論』 19,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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