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역절목(良役節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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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숙종 37)에 비변사에서 양역으로 불리던 군역을 개혁하기 위하여 마련한 규정.

개설

조선왕조의 군역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의 원칙에 따라 정군(正軍)과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족(奉足), 혹은 보인(保人)을 기본단위로 하여 운영되었다. 정군과 보인은 하나의 군호로 편제되어 군적에 기재되었는데, 17세기 전후부터 군적이 부실해지고 군역 대상자인 양정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양정이 도망가서 이웃과 친족에게 대신 군역을 부과하는 인징(隣徵)· 족징(族徵)의 폐단이 끝이 없었으며, 이미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여 징병·징수하는 백골징수(白骨徵收), 황구첨정(黃口添丁)이 벌어졌다. 그러자 정부는 전국의 양인장정을 대상으로 역(役)의 있고 없음을 조사해서 역이 없는 자에게 모두 역을 부과하고, 병들어 곧 죽게 생긴 자와 유랑 걸식자까지도 모두 군적에 올렸다. 이 때문에 장부상의 인원은 많았으나, 실제 군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양인 군역에 대한 개혁안이 논의되었으며, 1711년에 도망·사망·노제(老除)로 인한 양정 군액의 결원을 지방의 현지에서 충정(充定)하는 방안으로 「양역변통절목」이 반포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7세기 말에 양인 군역에 대한 개혁으로 양역변통(良役變通)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양정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양정 확보책이 내려졌다. 이에 1676년(숙종 2)에 병조에서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 10조(條)를 건의하고 임금이 이에 대한 시행을 명하였다(『숙종실록』 2년 6월 15일). 이것은 역의 부담이 주어지지 않은 한정(閑丁)을 조사하여 군인 수를 보충하려는 방책이었다. 양역부과 대상을 11세까지로 조정하고 그 이하 5세까지도 군역 예비자들로 파악해 두는 등 양역자를 적극적으로 확충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또한 군적에 도망·사망 및 노제(老除)로 인한 결원을 채워 넣기 위해서라도 양정사핵절목의 시행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양정의 수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은 이후 역을 실제 부담할 수 있는 장정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1695년(숙종 21)부터 수년간 혹심한 흉년이 지속되어 조선후기 이래 증가된 군액을 줄이는 조치가 있었으나 양역제의 동요는 여전하였다. 이 때문에 1703년 9월에 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하였다. 여기서는 총 군역자 수인 역총(役摠)을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이 적은 역으로 양인 장정들이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하여 각 역의 부담을 고르게 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1705년에 나온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이 그 결과물이었다. 이어서 1711년에는 비변사에서 「양역변통절목」을 건의하여 지방의 현지에서 군액을 채우는 방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숙종실록』 37년 12월 26일).

내용

1711년의 「양역변통절목」은 신역 대상자가 도망하거나 죽는 등의 이유로 결원이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대체 인력을 채우지 못하는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양인 장정이 사망한 경우, 사후 처리 비용으로 들어가는 정채(情債)·작지(作紙)의 비용 때문에 사망증명서를 받기 어려워 계속 징포(徵布) 대상으로 남게 되며, 도망자는 그 진위 여부를 구분할 수가 없어서 인족에게 징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절목에서는 사망한 경우에 부모가 즉시 관에 알리고, 수령이 직접 검사하여 반드시 사망 증서를 즉시 발급하고, 하리(下吏)들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또 관에서 받는 일종의 수수료인 작지(作紙)를 면제하여 전과 같은 폐단이 없도록 하였다. 혹 부모가 즉시 관에 고하지 않으면 같은 마을의 임장(任掌)이 보고하여 즉시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망한 실상(實狀)을 명백히 조사하여 세초(歲抄)의 기한에 구애받지 말고 즉시 대정하도록 하였다. 도망자도 그 이임(里任)으로 하여금 본관(本官)에게 보고하게 한 후 두두인(頭頭人) 및 3절린(三切隣) 등에게 조사하여 공초(供招)를 받아 뒤에 참고하게 하고, 즉시 사실을 아뢰지 않은 임장은 드러나는 대로 무겁게 탄핵하도록 하였다.

도망하거나 사망하였다고 한 자가 뒤에 나타나 이전의 보고가 거짓임이 드러나면, 이임과 이웃 등을 중하게 논죄하여 본역(本役)에 충정하고, 늙어서 면제하는 노제의 경우에 80~90세에 이르렀는데 그대로 군안(軍案)에 실려 있는 자는 역시 자세히 조사하여 대정하도록 하였다. 혹 부유한 세력가의 아들을 숨기고 의지할 바 없는 자를 대신 채우는 경우나 가명으로 거짓 충정하고 그 마을에서 번포(番布)를 마련해 납부하는 경우는 엄히 조사하여 중하게 처벌하도록 하였다.

만약 해당 마을에서 ‘모두 소속된 곳이 있고 부역 없이 한가로운 사람이 없다.’고 보고하면, 그 마을의 민가가 몇 호이며 남정이 몇 명인가를 빠짐없이 조사해 각각 그 이름 아래에 기록된 역명(役名)을 장적(帳籍)에서 증빙하고, 각각의 소속된 군안이 혹 호적에서 누락되었거나 함부로 소속된 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역에 우선적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군역의 결원은 이임의 자제라 하더라도 차출하여 반드시 채워야 하며, 그런 연후에도 결원이 있을 경우 비로소 이웃 마을로 이송(移送)하게 하였다.

각 마을의 임장(任掌)은 반드시 가려 뽑도록 하였다. 최고 책임자인 상존위(上尊位)와 그를 보조하는 부존위(副尊位)를 정하는데, 그 마을에서 명망 있는 양반을 상존위로 정하였다. 다만 한정(閑丁)을 망보(望報)하는 한 가지 일은 전적으로 부존위 이하에게 위임하여 상존위로 하여금 검찰하고 신칙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여러 사람이 보고 공론(公論)이 있어서 충정하는 천거에도 감히 공공연히 사(私)를 부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각 지역에서 실상과 다르게 군역자 명목이 작성된 경우를 하나하나 찾아낸 다음 군액을 현실에 맞춰 삭감하고, 군관이나 기패관 중에서도 활쏘기 시험이나 경서암송 시험에서 떨어진 자는 제거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일정 시기에 도망하거나 사망한 자를 조사하여 결원이 생긴 경우 해당 군역을 모두 대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령으로 하여금 각색(各色) 명목(名目)에 대해 반드시 사정(査定)하도록 하였다. 교생(校生)은 우선 고강(考講)에 낙강(落講)하는 자를 정원수 내의 원액(元額)으로 충정하고, 정원 외의 숫자는 수령으로 하여금 1년에 한 번 고강하여 군액에 보충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서원(書院)의 서재생(西齋生)은 대현(大賢)을 추향하는 서원은 30명, 사액 서원(賜額書院)은 20명, 사액하지 않은 곳은 15명으로 하여 역시 아울러 교안에 싣도록 하였다.

각 고을의 민호(民戶)와 군액은 혹 많고 적음에 차이를 보이니, 감사(監司)가 형세를 자세히 살펴 백성은 적은데 군액이 많은 곳을 참작하여, 백성은 많은데 군액이 적은 곳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변천

「양정사핵절목」은 양정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고 취해진 조치이나, 그 의도대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양정사핵절목」이 공포되기 1년 전에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가 시행되어 호적상 5호를 1통으로 편제하게 된 점이 주목되었다. 당시의 호적에는 새롭게 등재되는 호구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하여 볼 때 정부 차원에서 호구 파악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의 호적에는 다른 시기에 비해 나이 어린 자가 많이 등재되고 그중 군역을 직역(職役)으로 기록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는 1676년(숙종 2) 11세 이상 나이 어린 자들을 양정으로 확대 적용시킨 「양정사핵절목」의 시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양정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7세기 말부터 양역의 총액을 축소하거나 더 이상 증가시키지 않도록 소속기관별·역종별 정족수를 확정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역 부담 능력이 있는 건실한 자를 단역(單役)으로 확보하는 것이 징병·징포(徵布)를 위하여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양역변통절목」이 반포된 이후에는 양역의 역종별 정원을 중앙기관 소속 군역에 한정하지 않고 지방에 소재하는 감영 및 군영 소속 군역에도 확대하여 시행하였다. 양역을 정액화하는 작업은 기관별·역종별 총액만이 아니라 군현마다 군액을 확정하는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1740년대에는 군현별로 파악한 양역 총액이 『양역실총(良役實摠)』으로 반포되었다. 이것은 모든 양역 군보의 군포(軍布) 부담을 1필로 균일화하고 부족분을 토지에 부과한 균역법의 기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 『경상도단성현호적대장(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
  • 김우철, 「均役法 시행전후의 私募属 연구」, 『忠北史學』 4집, 1991.
  • 손병규, 「호적대장 職役欄의 군역 기재와 ‘都已上’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39, 2001.
  • 정연식, 「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變通」,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