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약조(丁未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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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명종 2) 조선이 사량진왜변 이후 중단되었던 대마도와의 통교를 다시 허가한 조약.

개설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1512년(중종 7)에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대마도와의 통교를 허용하였으나 통교와 무역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이 서로 싸우던 전국시대로 국내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구들은 이 틈을 타서 다시 조선의 연안을 침입하였고, 조선인들과 충돌도 계속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544년(중종 39) 4월 대마도 왜인 200여 명이 왜선 20여 척을 타고 당시 고성군 사량진(현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동쪽에 침입하여 사량진성 주위를 포위하고 갑옷과 궁시로 무장하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성을 공격하는 이른바 사량진왜변을 일으켰다. 이에 사량진만호유택(柳澤)이 힘써 공격을 저지하자, 왜인들은 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인은 20여 명이 사살된 반면, 조선군은 수군(水軍) 1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양론으로 맞섰고 절왜론(絶倭論)까지 대두되자 같은 해 5월에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대마도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을 돌려보내는 등 왜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 후 다시 일본과의 통교 재개 여부를 놓고 왜변을 계기로 통교를 단절하여 왜인 접대에 따른 폐단을 없애자는 주장과 통교의 단절은 불가하다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논의 결과 일본국왕사와 대내전사(大內殿使)·소이전사(小二殿使)는 옛 관례대로 접대를 허용하였으나, 대마도에서 도항하는 왜인의 접대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새로운 형태의 무역인 영봉선(迎逢船)의 왕래가 허용되었다. 영봉선이란 원래 조선에 온 일본국왕사가 돌아갈 때 이를 마중하러 오는 선박을 말한다. 그러나 점차 조선으로부터 하사받은 물품을 한 번에 수송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왕사선에 여러 척의 선박이 동행함에 따라 인물재수선(人物載輸船) 또는 인선(人船)이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는 무역 행위를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봉선 무역이 나타났으며, 그 후 영봉선을 늘려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국교 중단 기간의 무역을 대치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일본국왕사와 소이전사가 도항하여 통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아직 명종이 유약하고, 또 왜인들이 다시 난동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통교를 허용하여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46년(명종 1) 5월 대마도에서 적왜(賊倭)를 참수하여 옴에 따라 통교 재개를 논의하였고, 10월에 일본국왕사 안심동당(安心東堂)과 소이전사 춘강(春江)이 중종과 인종의 치제(致祭)를 이유로 도항하였다. 이때에도 안심동당이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하고, 다시 요청하면 그때 논의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1547년(명종 2) 2월 근정전에서 일본국왕사를 인견하면서 대마도의 죄가 매우 크지만 일본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왔고, 서계(書契)의 내용도 매우 간절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하고 대마도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3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마도와의 통교 관계가 회복되었고, 사량진왜변 이후 나타났던 영봉선은 자취를 감추었다.

내용

사량진왜변 이후 표면적으로 중단되었던 대미도와의 무역은 실제로는 여전히 성행하였고, 또 일본국왕사가 계속 내왕하며 중종의 영전에 부의(賻儀)도 올렸다. 그리고 선왕의 대상(大喪)이 지나자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대마도의 통교·무역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정미약조의 내용은 다음 6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첫째, 세견선 25척은 대선 9척, 중선과 소선 각 8척으로 하고, 각 선의 인원수를 초과하면 유포량(留浦糧)을 절반으로 줄인다. 수도서인선(受圖書人船)과 수직인선(受職人船)의 인원수도 이에 준한다. 둘째, 배 위에서 사용하는 잡물은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셋째, 풍랑을 핑계로 가덕도 서쪽에 정박하는 자는 적왜로 규정한다. 넷째, 50년 전의 수도서인과 수직인은 임신약조에 의거하여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섯째, 밤에 담을 넘거나 헐고 나아가 여염집을 왕래하는 자, 삼소선(三所船)을 타고 여러 섬을 몰래 다니는 자, 칡을 캔다는 구실로 산에 올라 멋대로 돌아다니는 자는 영구히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째, 모든 약속은 진장(鎭將)의 명령에 따르고, 이를 위반한 사실이 무거우면 3년, 가벼우면 2년간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변천

정미약조를 체결한 뒤 왜인들이 약정된 수대로 도항하지 않으므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자세히 대조하여 위반자가 없도록 하였다. 한편 대마도주는 정미약조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견선 5척을 늘려 줄 것과 심처왜인(深處倭人)에게 도서(圖書)와 관직을 다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553년(명종 8) 일본국왕사 안심(安心)은 정미약조 중 배 안의 인원 점검법을 폐지하고 배의 크기를 대·중·소선으로 척량(尺量)하여 급료를 주도록 요청하였다.

1557년(명종 12) 3월에 대마도 세견1선사선 평강차(平康次)가 도항하여 제포 항로의 허용과 특송선의 접대, 세견선을 늘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의 세견선 5척(대선 2척, 중선 2척, 소선 1척)을 늘려 30척으로 하는 정사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약조는 대체적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선조 25)까지 지속되었으나 이후에도 왜구의 불법적인 침범은 계속되었다.

의의

정미약조는 임신약조의 내용보다 더 엄격하게 대마도주의 통교를 제한하고, 수직인과 수도서인의 통교를 정리하였으며, 세견선의 선형과 급료, 위반할 때의 벌칙까지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정미약조의 체결로 통교는 재개되었지만 일본 국내 정세의 혼란으로 평화로운 통교 관계는 유지되지 못하고, 왜구의 불법 침입이 계속되었으며, 결국 1592년에 임진왜란이라는 대 전란을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5.
  • 長節子, 「壬申·丁未約條接待停止深處倭に關する考察」, 『年報朝鮮學』 10, 2007.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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