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전문(表篆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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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보내는 사대문서(事大文書)로 황제에게 올리는 글인 표문(表文)과 황태후·황후·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인 전문(箋文)을 함께 이르는 말.

개설

조선은 전근대 국제 관계였던 조공·책봉 체제 하에서 명분과 실리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의사를 효과적으로 중국에 전달하는 방법은 사행(使行)을 통해 이루어졌고, 사행은 문서 전달의 방식을 통하여 실행되었다. 조선이 명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사대외교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인 외교문서는 매우 중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명에 보내는 표전의 문장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홍무제가 조선의 표전 자구(字句)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표전 문제가 양국 사이의 외교 문제의 현안으로 대두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태도에 격분해 정도전과 남은을 중심으로 태조의 지원 아래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력을 증강해 진도강습(陣圖講習)을 강화하는 등 요동정벌을 꾀하였다. 그러나 1398년(태조 6) 5월 명나라태조가 세상을 떠났으며, 9월에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도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조선 왕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해 표전 문제와 요동정벌 계획은 일단락되었다.

서지 사항

표문의 구성은 미사(尾辭) 부분에 ‘무임(無任)’ 2자를, 강희제(康熙帝) 이후에는 ‘앙성(仰聖)’ 아래에 옮겨 적었다. 동지표(冬至表)의 경우에는 강희제 이후 표문의 수미(首尾)에 있는 ‘계수계수(稽首稽首)’는 ‘계수돈수(稽首頓首)’로, ‘격절병영(激切屛營)’은 ‘환변(歡忭)’으로 고쳐 적었고, 삼절표(三節表)도 동일하게 적용하였다.

행두법(行頭法)에서 모든 글자는 높고 낮음에 4층(層)이 있는데, 이를 ‘행(行)’이라 고 한다. 표문(表文)·전문(箋文)·장문(狀文)은 1자마다 1행이 되고, 주문(奏文)과 자문(咨文)은 1자를 건너 뛰어 1행이 된다. 또한 대사(儓寫)·간사(間寫)·조사(措寫) 등의 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등 수미의 수시로 변화되는 형식과 중국 문서 체계의 규칙을 적용해 예문관(藝文館)에서 작성하였다.

구성/내용

표문의 내용을 세종 시기 명나라에 사은한 표문과 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천자에 대한 공경과 하사품에 대한 감사의 기술과 황제의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 일로 시작한다. 또한 방물을 보내는 표문에는 황제가 하사한 물품에 보답하는 방물의 종류와 수량들을 적었다. 황세저포(黃細苧布) 3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30필, 흑세마포(黑細麻布) 50필, 만화석(滿花席) 20장, 황화석(黃花席) 2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20장, 인삼 100근, 잣 300근이 그것이다. 끝으로 표문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나온다.

전문에는 황태자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고, 황태자가 베푸는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을 담았다. 황제에게 올리는 방물과 마찬가지로, 황태자에게도 백세저포 10필, 흑세마포 10필, 만화석 10장, 채화석 10장, 인삼 50근, 잣 100근을 헌상한다고 적어 놓았다.

참고문헌

  • 박원고, 『명초조선관계사연구』, 일조각, 2002.
  • 김경록, 「조선시대 사대문서의 생산과 전달체계」, 『한국사연구』 34, 2006.
  • 유연석, 「고봉 기대승의 표문연구」, 『전통과 현실』 7, 재단법인 고봉학원, 1996.
  • 이광도, 「기명대적조선국표문(記明代的朝鮮國表文)」, 『학술계간』 4-2, 대북,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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