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겸(崔汝謙)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9일 (화) 22:57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763년(영조 39)~1801년(순조 1) = 39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거주지는 전라북도 무장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전라도 무장(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 제사를 폐하여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를 일으킨 진산의 윤지충(尹持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이후 처가가 있던 한산(韓山)에서 이존창(李存昌)을 만나 더욱 신앙심이 두터워졌다.[『사학징의(邪學懲義)』] 그는 고향인 무장으로 돌아온 후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며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이때 최여겸(崔汝謙)은 처가로 피신을 하였는데 그가 무장에서 입교시킨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그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어 그해 4월에 한산에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한산 관아에서 문초를 받다가 다시 무장으로 이송되었으며, 얼마 후 전주 감영으로 재이송되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전주 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심문을 받은 최여겸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았고, 결국 그해 5월 16일 사형선고가 내려졌다.(『순조실록』 1년 5월 16일) 이후 그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7월 19일 개갑 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순조실록』 1년 7월 13일),[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1,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