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창(李存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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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9년(영조 35) ~ 1801년(순조 1) = 43세]. 조선 후기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사망자. 세례명은 루도비코 곤자가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예산과 전라도 고산이다. 충청도 내포 지역 천주교 전파의 사도로 불린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충남 예산(혹은 천안)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는 설과 홍낙민(洪樂敏)·홍낙교(洪樂敎) 형제로부터 배웠다는 설이 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수기(隨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786년(정조 10) 가성직자단에 임명되어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친인척과 친구,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천주교로 인도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그 결과 그는 내포지역 천주교 전파의 밑거름이 되었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의 발발로 공주감영에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으나,(『정조실록』 15년 11월 3일) 결국에는 배교를 하고 석방되었다.(『정조실록』 15년 12월 2일),(『정조실록』 15년 12월 11일) 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자신의 신앙을 저지하는 형을 피해 좀 더 안전하게 활동을 펼치고자 그해 12월 30일 집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였고, 얼마 후 다시 금산(錦山)을 거쳐 고산(高山)에 정착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추안급국안』]

그는 1795년(정조 19)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전라도로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말 <을묘박해(乙卯迫害)>의 여파로 또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다시 2년 후인 1797년(정조 21) <정사박해(丁巳迫害)>로 재차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정조실록』 21년 2월 23일) 당시 정조는 이존창이 개과천선을 한다면 방면할 것을 명하였으나,(『정조실록』 21년 2월 23일) 그는 쉽사리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이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그에 대한 사형을 청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2년 5월 22일),(『정조실록』 22년 8월 8일) 그후 그는 2년이 넘는 옥살이 끝에 결국 배교를 하고 석방이 되었다.(『정조실록』 23년 6월 4일),(『정조실록』 23년 8월 3일),[『추안급국안』]

그러다가 1801년(순조 1) 1월 신유박해가 시작되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이존창은 다시 체포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순조실록』 1년 2월 5일) 그해 2월 9일 공주(公州)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의금부로 이송되어 추국을 받았다.[『추안급국안』] 그는 심문 과정에서 잠시 배교를 하였으나, 다시 마음을 바꾸어 천주교 신앙을 주장하였고 결국 2월 25일 사형선고가 내려졌다.(『정조실록』 1년 2월 25일) 공주로 이송된 이존창은 2월 27일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정조실록』 1년 2월 26일),[『승정원일기』정조 1년 2월 6일]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한편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중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서 1791년(정조 15) 이존창의 공조를 담당한 박종악(朴宗岳)이 정조에게 보낸 서찰 가운데 ‘사노비’로 표현한 부분이 있어 연구가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박종악, 『수기(隨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