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숭원(朴崇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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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2년(중종 27)~1593년(선조 26) = 62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자는 상화(尙和)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예조 참판박광영(朴光榮)이고, 아버지는 군수박난(朴蘭)이며,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나성령(羅城令) 이지(李漬)의 딸이다.

명종 · 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 1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었고, 얼마 뒤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1574년(선조 7) 2월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그 해 4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583년(선조 16) 8월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4월에 장례원(掌禮院)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12월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588년(선조 21) 7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5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그 해 6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가자(加資)되었다가 그 해 7월 초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2세이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等)에 책훈(策勳)되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근실하였다고 한다. 그는 오래 동안 후설(喉舌)의 자리 곧 승지로 있었는데, 선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꾀로써 살려고 하는데 박숭원만은 그렇지 않다.”라고 할 정도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시호와 가족

1601년(순조 34) 5월 나라에서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밀천군(蜜川君)에 추봉되었다. 첫째부인 이씨(李氏)는 이홍신(李弘神)의 딸이고, 둘째부인 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조언국(趙彦國)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주읍지(淸州邑誌)』
  • 『대동야승(大東野乘)』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