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도(蘇東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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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2년(선조25)∼1671년(현종12) = 80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세거지는 전라도 익산(益山)이다. 아버지는 찰방(察訪)소만선(蘇萬善)이고, 어머니는 유씨(柳氏)였다. 소세량(蘇世良)의 동생 소세공(蘇世恭)의 증손자이고, 북병사(北兵使)소두산(蘇斗山)의 5촌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17년(광해군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시대에는 벼슬하지 못했다. 1635년(인조1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4세였다.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에 보임되자 사람들은 그의 능력에 견주어 걸맞지 않다고 하였으나 그는 불평하지 않고 태연하였다. 그 뒤에 여러 참하(參下)의 관직을 지내고, 1646년(인조24) 사헌부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647년(인조25) 은산군수(殷山郡守)로 나갔다가,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옮겼는데, 선정을 베풀어서 은산과 정주 백성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웃 고을 수령(守令)들도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청북어사(淸北御史)’라고 불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1)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을 때 풍토병에 걸려서 위독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고 국방에 힘을 썼다. 그 뒤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면직되었다. 병이 조금 회복되자, 담양부사(潭陽府使)와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659년(효종10)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휘하 수령의 전최(殿最: 근무평정)를 공정하게 하였다. 1661년(현종2) 70세의 고령이었으나 김제군수(金堤郡守)에 임명되었는데, 김제 고을에 잠깐 부임하였으나 과오로 구속되었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에 고향 익산으로 돌아가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1671년(현종12) 숙환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80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성리학의 윤리를 몸소 실천하여 효도로써 부모를 섬겼다. 어버이의 병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바쳤고, 아침저녁으로 어버이를 보살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올렸고, 부모의 상제(喪制)는『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랐다. 이후원(李厚源)은 그를 청신(淸愼)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전라도 익산(益山) 탄곡(炭谷)에 있고, 그 아들 소후산(蘇后山)의 부탁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익산의 남촌서원(南村書院) ·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송시열의 종조부인 송희건(宋希建)의 딸이다. 아들 소후산은 사평(司評)을 지냈다. 그가 영국공신(寧國勳)에 책훈되어, 그 아버지 소만선은 병조 판서에, 조부 소건(蘇健)은 좌승지에, 어머니 유씨(柳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부인 송씨도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죽유시집(竹牖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