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관(朴大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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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6년(영조 32)~미상]. 조선 후기 순조 때 활동한 의병장. 행직(行職)은 오위장(五衛將)이다. 자는 정숙(貞叔)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인백(朴寅*)이다. 형은 박대혁(朴大赫)·박대성(朴大晟)이다.

홍경래 난 때 의병 활동

1809년(순조 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洪景來)가 김사용(金士用)·우군칙(禹君則)·이희저(李禧著)·김창시(金昌始) 등과 모의하여 평안도 가산군(嘉山郡)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박대관이 살고 있던 평안도 철산(鐵山)에도 반란군이 들이닥쳐 철산의 서림성(西林城)을 10여일 만에 점령하자, 박대관은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입하는 데 선봉에 섰다. 1812년(순조 12) 2월 10일 의병 43명, 3월 5일 의병 20명과 말 두필, 3월 19일 의병 18명을 모집하여 관군과 연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 12석을 거두어 대진(大陣)을 응접하여 난(亂)을 진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박대관은 <홍경래 난> 진압 후 의병장으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1814년(순조 14) 오위장(五衛將)에 조용(調用)되었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진중일기(陣中日記)』
  • 『서정일기(西征日記)』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