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인(被虜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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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의 침략과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

개설

피로인은 조선인으로서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 과정에 포로가 되어 강제로 끌려가거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 와중에 역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을 뜻한다. 이러한 피로인의 발생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일본 및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접촉하여 그 일부를 쇄환해 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피로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기간 동안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를 정도로 크게 발생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초기에 승전을 거듭한 일본군은 군사 작전에 일부 조선인 포로를 이용하였고, 부족한 노동력의 보충과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많은 수의 포로를 납치해 갔다. 이런 왜란피로인(倭亂被虜人)은 에도막부가 관계 회복을 요청해 옴에 따라 일부 쇄환되기도 하였으나, 대개 일본 사회에 하층민으로 동화되었으며, 개중에는 쇄환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왜란에 비하여 호란은 상대적으로 단기간의 전쟁이었으나, 왜란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피로인이 발생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은 ‘포로사냥’에 주력하였는데, 이렇게 발생한 호란피로인(胡亂被虜人)의 쇄환 문제가 호란 이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가장 큰 현안이 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일부는 속전(贖錢)을 지불하고 쇄환되었으며, 스스로 탈출해 돌아오는 주회인(走回人)도 있었다. 그러나 호란피로인의 대부분은 청나라를 떠나지 못한 채 그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문헌상에서 ‘피로인’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나오는 신라 급찬(級飡) 조미압(租未押)이다. 조미압은 백제에 포로가 되어 좌평(佐平)임자(任子)의 가노(家奴)가 된 인물이다. 이민족에 의한 피로인으로는 『고려사』 「세가」 문종 조에 동여진(東女眞)이 사로잡은 고려인을 쇄환한 기사가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도 적지 않은 수의 피로인이 발생하였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기까지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피로인이 많이 발생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399년(정종 1)에 통신관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파견해 피로인 남녀 100여 명을 쇄환해 오는 등 외교적으로 대처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무력도 사용하였다. 북쪽 변방에서는 여진족에 의하여 조선인 피로인이 발생하였다. 조선 조정은 여진에 대해서도 강경과 온건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조선시대에 피로인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은 왜란과 호란 등 양난(兩亂) 시기였다. 임진왜란 동안 일본군은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잡아갔는데, 그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60,000에서 100,000 사이로 추정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간 경위는 대개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 내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동기를 들 수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전쟁에 많이 동원된 일본 서부 지역의 다이묘[영주]들은 영내(領內)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잡아가 경작을 시키거나 노역에 동원하였다. 둘째, 조선의 우수한 도자기 기술자, 곧 도공(陶工)이나 여타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셋째, 전쟁 기간에 조선에 머문 피로인들은 주로 일본군의 군사 작전을 위한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개 군량 수송이나 축성(築城) 등의 잡역에 동원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일본으로 끌려갔다.

호란은 몇 개월에 걸친 비교적 단기간의 전쟁이었으나, 임진왜란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피로인이 발생하였다. 현재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500,000명 안팎으로 추정되어, 왜란피로인보다 무려 10배나 많다. 특히 호란피로인의 거의 대부분은 병자호란 때 발생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의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전쟁 중에 민간인 포로 획득에 주력하는 여진족의 전쟁 양상이 그대로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만주 일대의 여진인 사회에 노동력이 늘 부족하였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다. 특히 만주에서 새롭게 흥기해 국가를 세웠으나 농사에 서툴러 항산(恒産)이 불안정하던 청나라(후금) 측에서 농사 기술에 익숙한 한족(漢族)과 조선인 포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둘째, 포로를 일단 잡은 후에 그 가족으로부터 받아낼 몸값을 노린 경제적 동기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조선인 피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고, 한인(漢人) 부로(俘虜)들을 획득하는 데에도 같은 동기로 작용하였다.

조직 및 역할

피로인은 강압적인 폭력 수단에 의하여 발생하였으므로 사회적 조직과 역할은 최하층 내지 피지배 신분이었다.

변천

조선인의 피로가 발생하면, 조선 조정에서는 우선적으로 외교 접촉을 통하여 그들을 쇄환해 오는 데 주력하였다. 왜란피로인에 대한 쇄환은 종전과 함께 최고 사안으로 대두하였는데, 일본과의 교통을 재개한 기유약조(1609년)가 체결되기 전에도 두 나라 사이 대화 재개를 목표로 한 교섭 중에 등장한 주요 사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쇄환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쇄환사(刷還使)’라는 이름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에서 새로 등장한 에도막부도 내부의 안정을 위하여 조선과의 화해를 원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쇄환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규모는 소규모에 그쳤고, 세월이 흐르면서 쇄환 문제는 점차 잦아들었다. 특히 피로인 쇄환 과정 중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실무적 다리 역할을 담당하던 대마도 도주가 1617년(광해군 9)부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쇄환은 하향세로 완전히 돌아섰다. 또한 호란에 의해 대규모 피로인이 다시 발생한 후로는 왜란피로인에 대한 쇄환 노력은 어쩔 수 없이 종식되었다.

관련 연구들을 종합하면, 전체 왜란피로인 60,000~100,000명 중 쇄환으로 돌아온 수는 최대로 잡아도 10,000명을 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중에는 본인 스스로 쇄환을 원치 않고 일본에 정착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결국 왜란 중의 전체 피로인 가운데 80% 내지 90%에 해당하는 50,000~80,000명은 쇄환이 되지 않은 채 기술자나 하층민으로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조선에 돌아온 쇄환인일지라도, 동족인 조선인의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의 쇄환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청군(淸軍)이 애초 조선인 포로를 마구잡이로 끌고 간 목적이 노동력 확보 외에도 일종의 몸값인 속전(贖錢)을 노린 경제적 동기였던 데다가, 전쟁의 패배로 인해 극심한 재정 위기를 겪던 조선 조정의 형편으로 인하여, 쇄환은 쉽지 않았다. 조정 차원에서 몇 차례 속전을 지불하고 일부 피로인을 공식적으로 쇄환하기는 하였으나, 그 규모는 미미하였으며, 그마저도 주로 왕실 구성원의 쇄환에 집중되었다. 이에 쇄환을 위한 일정한 공식 통로 없이, 양반 집안에서는 형편에 따라 개별적으로 쇄환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속환가(贖還價)가 치솟아 조정에서 개별적 쇄환 시도를 불법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쇄환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탈출해 돌아오는 피로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에 주회인(走回人)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주회인을 붙잡아 다시 송환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놓고 숱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조선 조정은 상황에 따라 대처하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일부 주회인을 다시 청나라로 송환하기도 하였다.

쇄환되어 돌아온 호란피로인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왜란피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최대치로 잡더라도 전체 피로인 중 10%가 채 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란 발생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를 대략 8,000,000~10,000,000 규모로 추정할 때, 이는 전체 인구의 무려 5%가 넘는 500,000 가까운 인력이 한반도 밖으로 유출되어 돌아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결국 청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김문자, 「임진·정유재란기의 조선 피로인 문제」, 『중앙사론』 19, 2004.
  • 김종원, 「초기 조·청관계에 대한 일고찰-병자호란시의 피로인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71, 1976.
  • 민덕기,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귀환과 잔류로의 길」, 『한일관계사연구』 20, 2004.
  • 한명기,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재론」, 『역사비평』 제85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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