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전(康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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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국왕의 처소.

개설

강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가장 높은 위계를 갖는 전각으로 국왕의 일상적인 처소였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축되었고 1553년(명종 8) 화재로 잠시 소실된 것(『명종실록』 8년 9월 14일)을 제외하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까지 왕의 침전으로 있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대의 중건 공사로 복구되는데 이때 강녕전도 함께 복구되었다. 이후로도 화재와 복구가 반복되다가 1920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을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교태전(交泰殿) 등과 함께 헐려 옮겨졌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복구된 것이며, 창덕궁으로 옮겨진 강녕전의 흔적은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일부 찾을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내 사정전 북쪽, 교태전 남쪽에 위치하는 왕의 침전이다. 강녕전은 평상시에는 침소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주요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항목 중에서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 ‘중궁정지회명부의(中宮正至會命婦儀)’, ‘중궁정지왕세자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朝賀儀)’, ‘(중궁정지왕세자빈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嬪朝賀儀)’, ‘중궁정지백관조하의(中宮正至百官朝賀儀)’를 비롯하여 ‘납비의(納妃儀)’의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의절과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의 ‘조왕비(朝王妃)’ 등은 강녕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왕비가 백관과 내외명부, 왕세자 내외에게 조회를 받는 일이나 혼례의 일부 절차도 강녕전과 같은 침전에서 행해졌다.

후대에는 왕실의 어른을 위한 잔치가 종종 강녕전에서 행해졌다. 이렇게 행사가 있을 때에는 대청 중앙에 좌석을 설치하고 전면 월대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좌우의 방은 주요 인물의 행사 준비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강녕전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이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대의 경복궁 창건 기록에 ‘연침(燕寢)’이라 한 것이 바로 강녕전이다. 강녕전이라는 이름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으며,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을 따른 것이다. 최초의 강녕전은 지금의 강녕전과는 차이가 있는데 정면에서 7칸이었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이었고 대청 좌우로 2칸씩의 방을 둔 형태였다. 1553년(명종 8)에 강녕전에 화재가 있어 소실되었다가 이내 복구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강녕전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의 중건 공사를 통해 복구되었다. 하지만 1870년대의 연이은 화재로 재차 소실되었다가(『고종실록』13년 11월 4일), 1888년(고종 25)에 이르러 완전히 복구되었다(『고종실록』 25년 4월 12일). 1917년에는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소실되는데, 이것을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내전의 다른 건물들을 헐어 옮기면서 강녕전의 자재도 창덕궁 희정당 공사에 사용되었다. 현재 창덕궁 희정당 양 합각부에는 ‘강(康)’, ‘녕(寧)’이라는 글자가 있다. 지금 경복궁 내에 있는 강녕전은 1995년부터 시작한 경복궁 복원 사업에 의해 새로 조성된 것이다.

형태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 「북궐도형(北闕圖形)」,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의 도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종대 강녕전의 형태는 지금의 모습과 거의 같다. 현재의 강녕전은 정면 9칸에 동서 양면에 툇간을 놓아 11칸의 형태를 갖추었고, 측면도 몸채가 3칸에 앞뒤로 툇간을 놓아 5칸으로 보인다. 정면에서 보아 중앙부의 3칸은 모두 마루를 놓았고 툇간과 대청 사이에 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완전히 개방하거나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대청의 좌우로는 각각 9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의 주변으로는 툇마루를 돌렸다. 대청의 앞으로는 대청과 같은 폭의 월대를 두었다. 이 월대는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앞의 월대 등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평상시보다는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강녕전은 단층에 무량각 지붕으로, 강녕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궁궐지(宮闕志)』와 「북궐도형」에서는 이를 ‘무량각(無樑閣)’이라 명시하였다. 조선의 건축물 중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은 흔치 않으며 유독 왕실의 가장 중요한 침전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왕의 위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궁궐 침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만 조선전기에도 무량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양 측면 툇마루 아래에는 함실아궁이를 두었다. 함실아궁이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하던 난방 방식으로, 직접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지 않고 숯을 화기(火器)에 넣은 다음 이를 아궁에 속에 넣는 것이다. 강녕전의 굴뚝은 교태전의 문인 양의문 옆에 벽처럼 만들었으며 벽돌을 쌓아올려 문양을 만들었다. 툇마루 끝에는 창문이 아닌 문이 달렸는데, 이는 좌우의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연길당(延吉堂), 응지당(膺祉堂)과 복도로 연결되었던 흔적이다. 고종대 강녕전에서 거행하였던 진찬 그림이 남겨진 의궤를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임진왜란 이전 강녕전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은 명종조의 화재였다. 강녕전의 난방을 위해서는 화기(火器)를 넣을 때 방전(方塼)을 깔아야 했는데, 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발생한 화재였다(『명종실록』18년 2월 5일).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궁궐지(宮闕志)』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2003.
  •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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