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호(黃一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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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21)∼1641년(인조19) = 54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척(黃惕)이고, 어머니 진주강씨(晋州姜氏)는 강백룡(姜伯龍)의 딸이다. 큰아버지 호조 판서황신(黃愼)에게 양자로 갔다. 공조 정랑황대수(黃大受)의 손자이고, 풍옥(風玉)조수륜(趙守倫)의 문인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황일호는 황신에게 글을 배우다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황신과 동문수학한 조수륜에게 가서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5)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갔으나 바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양부 황신이 ‘유교7신(遺敎七臣)’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여 황해도 옹진(翁津)으로 유배되자, 황일호는 벼슬을 버리고 양부 황신의 적소(謫所)로 따라갔다. 1617년(광해군9) 황신이 유배당한 지 5년 만에 풍토병에 걸려 옹진에서 돌아가자 양모 전주이씨(全州李氏)도 충격을 받아 돌아갔다. 황일호는 부모상을 한꺼번에 당하여 거상(居喪)을 하면서 건강을 해쳐 견뎌내지 못할 뻔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광해군이 황신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를 운봉현감(雲峯縣監)에 초배(超拜)하였으므로, 생모 진주강씨(晉州姜氏)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정예병(精銳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러 가다가, 공주(公州)에서 인조를 알현하였다.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하였는데, 전주판관(全州判官)에 기용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군사를 모으려고 전주에 내려왔다. 그가 갈무리해 둔 무기와 곡식이 세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므로,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7) 친구 송광유(宋光裕)가 금구현(金溝縣)의 관비(官婢)와 몰래 간통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임천으로 도망오자 그를 숨겨주었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파직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4) 생모 강씨의 권유로,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1635년(인조13) 46세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나라를 공고히 하고 외적을 방어할 계책을 상소하였고, 형조 낭관(郎官)에 임명되어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평안도 가도(椵島)를 점거하고 있던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에 군량미를 요구하자, 황일호는 어명을 받아 가도를 왕래하면서 모문룡과의 협상을 잘 처리하였다. 1636년(인조14) 좌의정김상용(金尙容)이 그를 추천하여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군사들을 독려하여 청(淸)나라 병사와 싸웠으며, 화의(和議)를 맺을 때까지도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인조15)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그가 세자의 호위를 자청하여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생사(生死)를 알 수 없게 된 생모 강씨의 소재를 알아보다가 세자를 따라 가지 못하였다. 이 일로 황일호는 자신을 논핵(論劾)하였으나, 인조는 오히려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여 그를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고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의주부윤 황일호의 청나라 침공 계획

1638년(인조16)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인조에게 시무를 올렸다. 임지에서 황일호는 의주 사람 최효일(崔孝一) 등과 자주 만나고 왕래하였다. 최효일은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의 휘하에서 활약한 무반(武班)이었는데, 1637년(인조15) 인조가 항복한 다음에는 스스로 폐인(廢人)인 되어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황일호는 그가 절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후대하였고, 그와 교류하면서 명나라와 손잡고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최효일이 가족을 데리고 몰래 명나라에 망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주부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청나라에서는 최효일이 황일호의 밀명(密命)을 받았다고 의심하였다. 청나라 역관(譯官)정명수(鄭命壽)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최효일의 서신을 만들게 하고 그 서신을 의주에 있는 최효일의 조카에게 보냈다. 서신을 받은 조카는 답장에서 “황부윤(黃府尹)이 우리 집을 잘 보살펴주십니다.”고 하고, 또 “아저씨가 만약 황부윤을 통하여 본국[朝鮮]에 은밀히 통지한다면, 본국은 다시 명나라[天朝]와 손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러한 정황을 들은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노하여 용골대(龍骨大) 등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공갈하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황일호를 의주부윤에서 병조 참지로 옮겼다가 함경도 단천군수(端川郡守)로 나가게 하였는데, 그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사신을 거듭 보내,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와 내통하려 한 죄를 물어 황일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영의정이성구(李聖求)가 그를 구원하였으나 (『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3) 용골대와 정명수는 처형을 주장하며 위협하였다. 결국 황일호는 삭탈관직당하고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인조가 은밀히 청나라 사신과 역관에게 천금(千金)을 주고 황일호를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들은 받지 않고 1641년(인조19) 11월 9일 그를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54세였다.(『서계집(西溪集)』권14)

성품과 일화

황일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질이 남보다 빼어나고 기개가 탁월하여, 뜻을 세우는 것이 높았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겨서, 원근의 고아와 홀어미들을 모두 데려와서 부양하였다. 친구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하인들을 우대하는 한편, 이민(吏民)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신의(信義)로써 대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강북리(江北里)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숙종 때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부여 의열사(義烈祠), 운봉 용암서원(龍巖書院), 의주백마산성(白馬山城)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첫째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는 안중묵(安重默)의 딸인데 후사가 없고, 둘째부인 신평이씨(新平李氏)는 참봉이언경(李彦慶)의 딸로 자녀는 1녀를 낳았으며, 셋째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현감이광후(李光後)의 딸로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황윤(黃玧)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고, 3남 황진(黃璡)은 참봉을 지냈다. 차녀는 대사헌이민적(李敏迪)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참판이선(李選)의 처가 되었으며, 4녀는 우의정김석주(金錫冑)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조경일록(朝京日錄)』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