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량(黃俊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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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7년(중종12)∼1563년(명종18) = 47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풍기(豊基)이다. 아버지는 대호군황치(黃觶)이고, 어머니 창원황씨(昌原黃氏)는 교수(敎授)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관찰사황영손(黃永孫)의 손자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자, 막역한 사이였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렸고, 18세 때에 응시한 관시(館試)에서 고시관(考試官)이 그의 책문(策文)을 보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여 문명(文名)이 높아졌다. 1537년(중종32) 21세에 사마시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539년(중종34) 정시(庭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되었다. 1540년(중종35) 24세에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 학유에 보임되었다. 이어 성주 훈도(星州訓導)에 임명되었고, 1542년(중종37) 성균관 학유를 거쳐, 1543년(중종38) 성균관 학록으로 승진하여 양현고 봉사를 겸임하였으며, 1544년(중종39) 성균관 학정이 되었다. 1545년(인종1) 인종 때에 승문원 전고(殿考)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상주 교수(尙州敎授)를 지냈다.

명종 시대 활동

1547년(명종2) 성균관 박사와 전적을 차례로 맡았고, 1548년(명종3)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고향 풍기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0년(명종5) 복제(服制)를 마치고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명종6)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 승문원 교검, 추생어사(抽栍御史), 예조 좌랑,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대간 상사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 사간원에서 성질이 안정되지 못하다며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신녕현감(新寧縣監) · 단양군수(丹陽郡守) ·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연달아 맡았다. 성주목사로 4년 동안 재임하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풍기로 돌아오던 중에 1563년(명종18) 3월 11일 예천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47세였다.

재주가 탁월하여 글을 잘 지었는데, 저서로 『금계집(錦溪集)』이 남아 있다.

서원 창건 운동

1543년(중종38) 풍기군수(豊基郡守)주세붕(周世鵬)이 처음으로 민간 교육 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여 관학 중심의 조선 유학 교육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주세붕에 영향을 받은 황준량은 1551년(명종6)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부임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고, 1557년(명종12) 단양군수로 나아가서는 향교를 옮기고 서원을 세웠다. 1560년(명종15)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자 성주의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증수하고, 공곡서당(孔谷書堂) ·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창건하였다. 또한 그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아서 서원에서 유생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황준량은 주세붕의 서원 건립 운동을 뒤따라 실천하여, 이황과 함께 서원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성품과 일화

황준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좋았고, 미목(眉目)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준수하여 범상치 않았으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못하는 일이 없었다. 자질이 남달라 일찍부터 문자(文字)를 이해하였고, 남들을 놀라게 하는 말도 곧잘 하였다. 자기 소신을 굽히고 주현(州縣)으로 나가서 벼슬하였으나, 고을에서 맡은 일들이 낮고 하찮다고 여기지 않았다. 문묘를 증축하고 서원을 많이 세우는 한편, 부지런히 문부(文簿)를 살펴서 민사(民事)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혼자 지낼 때에는 방 안 사방의 벽에 성현(聖賢)의 훈계(訓戒)를 붙여두고 이것을 보고 스스로 깨우치고 반성하였는데, 특히 정자(程子)의 ‘주정지경(主靜持敬)’의 말씀에 깊이 감동하고 심취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사람들과 함께 찾아다니거나 혼자서도 찾아다녔는데, 그곳에 이르면 시를 읊으면서 느긋하게 거닐고 저녁이 되도록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러나다 문득 어수선한 벼슬살이를 떠나서 죽령(竹嶺)의 아래에 흐르는 금계(錦溪) 위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지어 도를 닦는 장소로 삼았고, ‘금계’를 자호로 하였다.

황준량은 16세 연상인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막역한 지우(知友)처럼 가까웠다. 한편,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그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황준량은 소윤(小尹)의 핵심인 병조 판서이기(李芑)와도 가깝게 지냈다. 그러자 김장생은 “황준량은 좋지 못한 사람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권간(權姦)에게 붙어 사관(四館)에서 벼슬하였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도 퇴계 선생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취하였지만, 그가 지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발문(跋文)」을 주자의 글 속에 끼어 넣게 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삭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사계전서(沙溪全書)』 권4) 그러나 황준량이 죽었을 때 시신을 염할 삼베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그의 살림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일생 청빈(淸貧)하게 살았으며 자기의 청렴을 가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내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풍기 산내곡(山內谷)의 선영에 있고, 부인과 합장되었는데, 이황이 지은 행장이 남아 있다.(『퇴계집(退溪集)』)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부인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찰방이문량(李文樑)의 딸이다.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였는데, 그의 행장에 따르면 동생 황수량(黃遂良)의 아들 황영(黃瑛)을 양자로 삼았다고 하고, 족보에 따르면 황지환(黃之煥)을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축록(己丑錄)』
  • 『퇴계집(退溪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농암집(聾巖集)』
  • 『무릉잡고(武陵雜稿)』
  • 『갈천집(葛川集)』
  • 『인재집(忍齋集)』
  • 『구암집(龜巖集)』
  • 『소재집(穌齋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퇴우당집(退憂堂集)』
  • 『문곡집(文谷集)』
  • 『남계집(南溪集)』
  • 『지호집(芝湖集)』
  • 『우헌집(寓軒集)』
  • 『하당집(荷塘集)』
  • 『장암집(丈巖集)』
  • 『남당집(南塘集)』
  • 『직암집(直菴集)』
  • 『금대시문초(錦帶詩文鈔)』
  • 『매산집(梅山集)』
  • 『연재집(淵齋集)』
  • 『용암집(龍巖集)』
  • 『단곡집(丹谷集)』
  • 『쌍봉집(雙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