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舟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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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연결해 만든 다리.

개설

일명 ‘배다리’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교(舟橋)는 정조가 화성(華城)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타고 건너는 대신, 배를 이용해 다리를 만들어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정조는 즉위한 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생부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였다. 이후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하고 수시로 이곳에 행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이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행행에 참가하는 많은 인원이 모두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널 경우에는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행렬이 흩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모든 인원을 실어 나를 배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 척의 배를 연결해서 도강하는 기존의 사례들도 있었지만,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대동하고 ‘을묘년 원행(園幸)’을 하는 정도로 행차 규모가 확대될 때에는 다리를 놓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을묘년 원행을 정리해놓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주교절목(舟橋節目)」에 잘 나타나 있다.

「주교절목」에 따르면, 현륭원으로 행행하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필요한 선박의 숫자가 4, 5백 척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배를 구하는 과정에서 농간을 부려 뱃사람들에게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정조는 배다리 제도를 만들어 경강(京江)의 큰 배들을 연결하여 교량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면 배를 찾아다니는 수고가 줄어들고 공력과 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배다리를 만들고 감독할 기구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였다(『정조실록』 13년 12월 4일). 주교사에서 배다리를 만드는 세부 사항을 다룬 「주교절목」을 만들어 제시했지만 정조의 의도와는 다른 면이 많았다. 이에 정조가 주교를 만드는 세부 사항인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직접 만들어 이것으로 배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주교지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배다리는 1790년 12월에 만들어졌다. 여러 지형상의 이점을 고려해 배다리가 설치된 곳은 노량진이었다(『정조실록』 14년 12월 24일). 배다리에 사용한 배는 경강의 배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배다리의 중앙부는 큰 배를 이용해 높게 만들고, 가장자리는 작은 배를 이용해 전체적으로 무지개 모양을 만들었다. 이들 배를 종량으로 연결한 다음, 이 위에 횡판을 깔아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다리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횡판 위에 잔디를 깔아 마감했다. 배다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배는 경강의 큰 배로 80척이 들었다고 하였다.

배다리가 노량진에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릉(宣陵), 정릉(靖陵), 장릉(章陵), 건릉(健陵), 현륭원에 행행할 때는 노량진에 만들었고 헌릉(獻陵), 영릉(英陵), 영릉(寧陵)에 행행할 때는 광진(廣津)에 설치하도록 했다.

배다리는 정조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져 고종대까지 설치되었다. 철종의 경우 인릉(仁陵)에 행차할 때 동작진(銅雀津)에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역사상 기록에 나타나는 최후의 배다리는 1898년에 농상공부에서 노량진에 만든 것이었다.

참고문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