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靑龍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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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양천허씨의 원당이었던 사찰로,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 위치한 절.

개설

청룡사는 고려말 보각 국사혼수가 주석했으며 그의 탑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태종이 승하하자 후궁이었던 신녕궁주가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을 사경하였는데 이때 세종이 청룡사에서 사경하는 도구들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천(陽川)허씨의 원당이었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청룡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서 알지 못하지만 고려말의 고승 보각(普覺) 국사(國師)혼수(混修)가 주석하였고 그의 탑비가 현재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규모가 매우 큰 절이었을 것이다. 혼수는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22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2년간 수행하였다.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나옹 화상이 주관하는 공부선장(工夫選場)에 참석하여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도망쳐 은거하였다. 그 후 왕명에 의해 여러 사찰의 주지가 되었고 1383년(고려 우왕 9)에 국사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392년에 청룡사로 거처를 옮긴 후 그곳에서 7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태조이성계가 보각 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했다.

(2) 조선시대

태종이 승하하자 후궁이었던 신녕궁주(愼寧宮主)가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을 사경하였는데, 세종이 나인(內人)으로 하여금 의발(衣鉢)과 등롱(燈籠)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사경하는 도구들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승려 정순(正恂)에게 청룡사(靑龍寺)에서 그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4년 6월 21일). 그리고 효령대군의 가신(家臣)들이 청룡사의 전지를 부당하게 빼앗으려 하여 승려들이 관아에 고소하였는데도 수령이 처벌하지 않자 세종이 그 소식을 듣고 수령을 처벌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8년 5월 13일). 이에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보고하였다(『세종실록』 8년 10월 3일).

광해군대에는 1617년(광해군 9)에 김자점(金自點)이 부친의 묘를 청룡사 앞산으로 이장하려 하자 왕이 청룡사는 조종조(祖宗朝)의 내원당(內願堂)이고 허잠(許潛) 역시 훈신(勳臣)으로서 서운산에 묘소가 있으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7월 15일).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은 양천(陽川)허씨의 선산이었기 때문이다. 허잠은 양천허씨로서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냈던 허적(許積)의 조상인데 숙종대에 청룡사가 허적의 선산 재궁(齋宮)이라고 하였다(『숙종실록』 6년 7월 15일). 청룡사와 양천허씨의 갈등도 있어서 정조대에 허묘(許昴)의 종이 염병을 앓자 청룡사에 가서 머물도록 하였는데, 청룡사 승려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허묘가 승려 치윤(致允)을 묶고 구타하여 6일 만에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청룡사 터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적운당(跡雲堂) 사리탑과 청룡사 위전비(位田碑) 등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 『심리록(審理錄)』
  • 「충주청룡사보각국사환암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 정영호, 「중원 청룡사지의 조사 :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과 탑비 및 석등을 중심하여」, 『사총』, 고려대학교 사학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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