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서(匿名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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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써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몰래 붙인 것.

내용

조선시대 합법적인 의사전달 체계로 상소·구언·격쟁·신문고 등이 존재했지만, 소수의 특권 신분이 독점하거나 절차가 복잡하여 대중적 참여가 미비했다. 반면 일반민은 주로 괘서(掛書)·익명서(匿名書)·벽서(壁書)·요언(妖言)·와언(訛言)·참요(讖謠)·격문(檄文)·통문(通文) 등 주로 비합법적 수단을 통해 상호 소통하였다.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 따르면 익명서는 자기 이름을 숨기고 혹은 남의 성자(姓字)를 빌려서 범죄 사실이 적힌 글(犯狀)로 몰래 투서(投書)하여 남의 죄를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대명률직해』에 명시된 익명서에 대한 처벌은, 성명을 숨긴 투서로써 남의 죄를 고소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러한 익명투서(匿名投書)를 본 자는 즉시 불태우거나 찢어 없애도록 하였다. 또한 발견한 자가 이를 소각하지 않고 관청에 들여보낸 자에게는 장(杖) 80에 처하고 관청에서 그것을 접수하여 처리한 자는 장(杖) 100에 처하였다.

익명서의 내용은 개인에 대한 고소 및 조정에 대한 비방이 많았다. 따라서 그 내용은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심지어 부자지간(父子之間)에도 말을 옮겨서는 안되었으며, 만약 말을 옮기거나 소각하지 않은 자는 대명률(大明律)로 논죄(論罪)되었다.

한편 익명서는 주로 인구의 이동이 많은 도성 내 종루(鐘樓)와 시가(市街)에 투서되었으며, 때로는 관사 및 궁궐의 어좌(御座)에 붙기도 하였다. 특히 자연재해로 생활이 궁핍한 상황에는 빈번히 발생하였다. 1475년(성종 6) 승정원에 진주목사(晉州牧使)강자평(姜子平)을 비방한 익명서가 붙었는데, 왕은 익명서를 붙인 자를 체포하거나 고발하는 자에게 실직과 상품 등 많은 포상을 내걸어 잡도록 하였다.

익명서의 특성상 그 내용이 남아있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1506년(연산군 12) 종루의 기둥에 익명서의 내용이 남아있는데,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도가 전(傳)에도 있으니, 가엾은 사량(司良)들아, 나의 의병(義兵)을 따르도록 하여 왕을 시해할 것이니 의병에 동참하라."는 선동 내용이다.

한편 1679년(숙종 5) 익명서 사건이 빈발하자 『대명률』 조항을 기본으로 「익명서정죄사목(匿名書定罪事目)」을 추가로 반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1734년(영조 10) 호서(湖西)·영남(嶺南) 지방에서 괘서(掛書) 사건이 발생하자 영조는 "지금부터 모든 익명서를 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우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용례

有人貼匿名書于鐘樓柱曰 弑君之道 於傳有之 嗟爾四良 從我義兵 驪川尉閔子芳密啓 王甚怒 問干政院曰 聞近日有匿名書 其知之耶 僉啓 未聞 尋命召領議政柳洵 左議政朴崇質 左贊成金勘 右贊成金壽童 傳曰 前此有匿名晝 窮推未得 亦有如此事 卿等知之耶 洵等啓 臣等未聞 傳曰 此必儒生所爲 令成均館窮搜以啓 又疑城基退標後 掇家人含怨而爲之 其令漢城府 抄東西城基家者中心行詭詐 可疑儒生以啓(『연산군일기』 12년 1월 28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대전회통(大典會通)』
  • 『목민심서(牧民心書)』
  • 한국법제연구원, 『大典會通硏究 -刑典·工典編-』, 1996.
  • 고성훈, 『朝鮮後期 變亂硏究』, 東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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