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루(鐘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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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종로 네거리에 종을 걸어놓았던 건물.

개설

1396년(태조 5) 한양에 처음으로 종루(鐘樓)가 설치되었다. 종루는 새로운 왕조의 개국을 알리며 새벽과 저녁에 종을 울려 성문을 열고 닫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일하고 쉬는 시각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화재와 전쟁 등으로 몇 차례 중건을 거친 후, 1895년(고종 32)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고 사액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보신각으로 불린다. 보신각이라는 명칭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사대문을 각각 흥인문(興仁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정문(肅靖門)이라 하였는데 도성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지였던 종루에 신(信)을 넣어 명명한 것이다.

변천

1396년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처음 지어진 종루는 정면 5칸의 2층짜리 누각이었다. 종루에 달기 위해 처음으로 만든 종은 시험 타종을 하다 파열되어 2년 후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다시 주조한 종을 매달았다. 종루에서는 매일 오후 10시경 28번의 종을 쳐 성문을 닫는 인정(人定)과 새벽 4시에 33번의 종을 쳐 통행금지를 해체하는 파루(罷漏)를 실시하였으며 도성 내에 큰 화재가 날 때도 종을 쳤다.

1413년(태종 13)에 대규모 행랑(行廊) 공사로 인해 종루를 종묘 남쪽으로 옮겼다 다시 종로 4거리로 이전하였다. 이때 물시계인 누기(漏器)를 함께 설치하여 물시계에 따라 종을 쳤으나 담당자의 실수 등으로 누기가 정확하지 못해 1437년(세종 19)에 경복궁 내에 있는 자격루에서 시간을 재어 종루로 전달하였다. 이를 위해 광화문 앞에 쇠북을 설치하였다.

1440년(세종 22)에 종루를 다시 고쳐 지었는데 이때 지어진 종루 건물은 동서 5칸, 남북 4칸의 2층 형태로 위층에는 종을 달고 1층에는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458년(세조 4)에 종루 개구(改構)에 맞춰 대종(大鐘)을 다시 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종루는 화재로 불에 탔고, 남겨진 종은 녹여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루를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전의 2층으로 된 종루가 아니고 1층으로 된 종각을 지었다. 이 종각은 조선말기까지 몇 차례 개수를 거쳤으며, 1895년(고종 32)에 고종이 보신각이라는 명칭으로 사액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또 한 번 파손된 종각은 1953년에 중건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종각은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조선시대 종루는 당시 도성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과 더불어 운종가(雲從街: 현 종로 네거리 인근)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중심지에 위치해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