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과흥청(地科興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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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때, 궐내 최고 기녀인 흥청(興淸) 가운데 왕의 총애를 직접 받지 못한 이들을 일컫던 호칭.

개설

연산군은 전국에 분포한 기녀들을 운평(運平)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가운데 특히 악가무(樂歌舞)에 재능이 있고 미모까지 출중한 자를 궁중에 들이고 흥청이라 불렀다. 흥청은 왕의 총애를 직접 받은 천과(天科)와 그렇지 못한 지과(地科)로 구분되었는데, 총애를 받았으되 왕이 만족하지 못한 경우에는 반천과(半天科)로 구분하였다[『연산군일기』12년 9월 2일 1번째기사]. 따라서 지과흥청(地科興淸)이란 외모와 재능이 뛰어난 흥청 가운데 아직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한 기녀들을 말한다.

내용 및 특징

흥청은 재주가 뛰어나고 자색까지 겸비한 최고의 기녀에게 붙인 칭호이다[『연산군일기』10년 12월 22일 2번째기사], [『연산군일기』10년 12월 23일 5번째기사]. 연산군은 흥청을 300명 뽑아 올리도록 했는데, 실흥청(實興淸)과 가흥청(假興淸)으로 구분하였다[『연산군일기』11년 4월 4일 2번째기사]. 흥청 아래에는 운평·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등으로 불리는 기녀 혹은 악인(樂人)이 있었다. 따라서 왕에게 직접 총애를 받지 못한 지과흥청은 천과흥청에 비해서 대우가 한 등급 낮았다[『연산군일기』11년 7월 6일 1번째기사]. 이들 흥청의 재주를 시험할 때는 장악원 제조라 할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앉아서 시재(試才)해야 할 만큼 그 위상이 높았다[『연산군일기』11년 2월 13일 7번째기사]. 그러므로 지과흥청은 자색이 뛰어남은 물론, 음악 및 춤에 대한 재능 역시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연산군은 풍두무(豐頭舞) 즉 처용무를 출 때, 흥청 수백 명으로 하여금 대비(大妃) 앞에서 풍악을 치면서 춤추며 놀게 하였다[『연산군일기』11년 11월 3일 6번째기사]. 또 경복궁에서 곡연(曲宴)을 베풀 때는, 흥청악 500여 명에게 아상복(迓祥服)을 입고 학춤을 추며 놀이하게 하다가 늦어서야 파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12년 1월 4일 7번째기사].

연산군은 재위 말년에 흥청을 말에 태우고 도성 사방 100리 이내에 세워둔 금표(禁表)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흥청을 대동한 채 술을 마시고 가무를 벌이는 등 주색잡기에 열중했다[『연산군일기』12년 1월 7일 3번째기사], (『중종실록』 1년 9월 2일). 심지어 흥청이 부모를 뵈러 갈 때는 승지와 선전관·감찰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호위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12년 2월 2일 9번째기사]. 외방에 있는 흥청의 부모들까지 모두 한양으로 올라오게 해 집을 포함한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그 형제자매에게도 관역(官役)을 면제해 주었다[『연산군일기』11년 6월 20일 1번째기사], [『연산군일기』11년 6월 21일 8번째기사].

그뿐 아니라 흥청을 위해 호화고(護花庫)를 두어 음식을 공급하게 하고, 보렴서(補艶署)를 두어 의복과 치장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공급하게 하였다. 후궁의 집을 짓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 시혜청(施惠廳)을 두어 흥청의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되,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항상 근무하게 하였다. 또 이들을 위해 광혜서(廣惠署)를 두어 제사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게 하고, 추혜서(追惠署)를 두어 상례(喪禮)에 쓰는 물품을 제공하게 하였다.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는 원래 대행(大行)을 위해 설치하였으나, 나중에는 흥청이 있는 곳에 두탕호청사를 두어 흥청을 종신토록 받들게 했다. 개인의 집과 토지를 빼앗아 흥청에게 주되, 그 소유 문서인 사패(賜牌)에는 반드시 ‘영세토록 전한다.’라고 표기하도록 하였다. 한편 흥청의 생계를 위해 1,000명에게는 유기 그릇을 주고 9000명에게는 잡기(雜器) 그릇을 주기도 하였는데, 해당 관사로 하여금 전국 각지의 민간에서 징발하게 했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

변천

흥청의 놀이 활동 양상은 『연산군일기』1504년(연산군 10) 5월 22일 기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왕이 대비 앞에서 직접 처용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할 때 흥청에게 화답하여 노래하게 했다는 내용이다[『연산군일기』10년 5월 22일 11번째기사]. 그해 12월에는 300명의 흥청을 취홍원에 두고자 했다. 천과흥청과 지과흥청을 구분하여 그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옷감 값[衣纏朔料]도 차등을 두어 주었다[『연산군일기』11년 7월 6일 1번째기사]. 흥청을 두는 병폐는 심했다. 흥청 명패만으로도 부모 행세를 하며 남의 집을 빼앗는 등 백성에게 미치는 병폐가 점점 심해졌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의 중종반정으로 흥청 제도는 폐지되고, 기존의 기생 제도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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