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成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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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1459년(세조5) = ? ].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충신.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성개(成槪)이고, 어머니 순천박씨(順天朴氏)는 한성부(漢城府)판윤(判尹)박가실(朴可實)의 딸이다. 대제학성석용(成石瑢)의 손자이고, 사육신(死六臣)성삼문(成三問)의 5촌 아저씨다.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0년 문종이 즉위할 때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직하였다. 1452년(문종3)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고, 이어서 1454년(단종2)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단종 시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4촌 형 성승(成勝)의 아들 승지성삼문(成三問)과 만나서 왕실을 보좌하여 죽음이 앞에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기로 서로 맹세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의 나이가 성삼문과 비슷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1456년(세조2)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성삼문 · 박팽년(朴彭年) · 이개(李塏)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세조의 참혹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죽었다. 그때 그도 연루되어 10여 차례 가혹한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세조가 그를 죽이지 아니하고 김해(金海)에 유배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어 부자가 서로 서신을 통래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처자는 종으로 삼았다. 이때 그 아들 성담수(成聃壽)와 성담년(成聃年)은 어머니 이씨(李氏)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을 거느리고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그의 묘표(『한수재집(寒水齋集)』 권31 「인재성공희묘표(仁齋成公熺墓表)」)에 따르면 1459년(세조5) 세조가 의금부(議禁府)에 전지하기를, “영속(永屬)하여 안치된 김해의 성희(成熺) · 성조(成照) · 성연(成然) 등은 자원(自願)에 따라 외방(外方)에 옮겨서 안치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충청도 공주(公州)의 달전리(達田里)로 옮겨가서 궁핍하게 살다가, 그해 스스로 살아남은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마침내 울분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1461년(세조7) 세조가 안치된 성희 등을 석방하도록 명하였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1471년(성종2) 성종이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여, 성희 등의 고신(告身)을 돌려주도록 명하였다고 하니, 그가 성종 초년까지 살았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저서로는 『인재집(仁齋集)』이 남아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장포(長浦)의 두문리(斗文里)에 있고, 부인과 합장되었다. 돌아간지 2백여 년 지난 후에 한수재(寒水齋)권상하가 묘표를 지었다. 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안성공(安成公)이견기(李堅基)의 딸인데, 자녀는 6남 6녀를 두었다. 장남 성담수(成聃壽)는 생육신(生六臣)이고, 차남 성담년(成聃年)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충청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경상도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손자 성몽정(成夢井)의 출세로,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문선(東文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추강집(秋江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관란유고(觀瀾遺稿)』
  • 『어계집(漁溪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