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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가 건립한 개경10찰 중의 하나로 경기도 개성시송악산 고려동에 있었던 절.

개설

왕륜사(王輪寺)는 고려 태조가 건립한 개경10찰(開京十刹) 중의 하나이다. 국가의 기원 법회와 도량[道場]이 자주 개설되었고,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기리는 원찰(願刹)이 되면서 크게 중창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절의 불상이 땀을 흘리는 신비한 일이 자주 일어나 기양재(祈禳齋)를 열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고려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창건하였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면서 개경에 10찰(十刹)을 세워 불교의 공덕으로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의 각종 기원 법회와 도량이 자주 열렸다.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휘신도량[諱晨道場], 오백나한의 가피를 기원하는 나한재(羅漢齋), 천재와 가뭄 등을 물리치려는 소재도량[消災道場] 등이 이어졌다. 또한 역대 왕들의 반승(飯僧) 행사도 빈번하게 열렸다. 절은 교종(敎宗)의 승과를 치루는 선시장(選試場)이기도 하였다. 지광(智光) 국사(國師) 해린(海麟)과 혜덕(慧德) 왕사(王師) 소현(韶顯) 등 여러 고승이 이곳 승과를 거쳤다. 13세기 전반 몽고의 침탈로 전소되었다가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중건되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절에 공주의 초상을 모시는 영전(影殿)을 지었다. 몇 년 후 증축하여 인희전(仁熙殿)이라고 하였는데 많은 금과 은으로 치장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 2)에는 절의 서편에 공민왕의 영전인 혜명전(惠明殿)을 지었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왕륜사의 불상이 땀을 흘리는 신비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1403년(태종 3) 흙으로 조성한 니불(泥佛)이 땀을 흘리자(『태종실록』 3년 12월 21일) 기양재를 열어 흉사에 방비하였다(『태종실록』 4년 1월 13일). 1409년(태종 9)에도 왕륜사를 비롯하여 연복사(演福寺)·흥국사(興國寺) 등의 불상에서 땀이 났다(『태종실록』 9년 10월 29일). 1460년(세조 6)에는 국왕과 왕세자가 행차하여 쌀 10석을 하사하였다(『세조실록』 6년 10월 8일).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1682년(숙종 8) 절 자리에 오관서원(五冠書院)이 건립되었다는 기록만 있다.

일제강점기에 절터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건설되어 절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참고문헌

  • 고유섭, 『송도의 고적』, 열화당, 1976.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3.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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