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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기준 최신판



논밭에서 작물을 재배할 때 생육을 도와주기 위해 비료를 주는 농작업.

개설

시비는 비료를 주는 위치에 따라 전답 표면만 시비하는 경우와 전답 전역에 걸쳐 시비하는 경우로 나뉜다. 그리고 그 시기에 따라 기비(基肥), 추비(追肥)로 나뉜다. 기비, 즉 밑거름은 파종, 이앙을 하기 전에 논밭에 넣어주는 거름, 또는 그렇게 거름을 넣어주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추비는 기비 이외에 작물의 생육상태에 맞춰 시용하는 비료로, 웃거름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농업사에서 고려말 이전의 시비 기술은 아직 알기 어렵다. 조선초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을 통해 당시 가축분, 초목(草木) 등 다양한 시비재료를 활용하여 시비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논에서 활용하는 시비재료와 밭에서 사용하는 시비재료를 달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후기 이후가 되면 작물이 자라는 도중에 시비를 해주는 추비도 많이 채택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농작물의 재배방식은 토지의 지력(地力)만 이용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조선초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시비(施肥)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시비 작업을 전반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한 용어가 분전(糞田)이었다. 이 분전이라는 용어에서 분(糞)은 기름지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고, 결국 분전은 시비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시비법은 크게 시비에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나오는 비료의 종류는 다종다양한 것이었다. 별다른 가공과정 없이 자연에서 채취한 초목 등이나 사람의 배설물과 같은 시비재료를 농작물 시비에 이용할 때, 이러한 비료를 자연비료(自然肥料) 또는 생분(生糞)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자연이나 인간에서 채취하였지만 농작물에 투하하기 전에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을 투하해야 하는 비료를 인공비료(人工肥料) 또는 숙분(熟糞)이라고 칭할 수 있다.

자연비료와 인공비료는 각각 본래의 시비재료에 따라 세분된다. 자연비료에는 초(草), 목(木), 토(土), 가공하지 않은 인분(人糞)과 우마분(牛馬糞)으로 나누어진다. 인공비료에는 초목을 태운 재, 오줌과 재를 섞은 요회(尿灰), 인분뇨, 우마분뇨 등과 초목 태운 재, 초목 등을 섞어 잘 부숙시킨 숙분(熟糞), 숙분과 뇨회를 섞은 분회(糞灰), 우마(牛馬)의 우리에 초목을 넣어 주고 우마가 잘 밟게 하는 동시에 우마의 분뇨(糞尿)와 섞이게 하여 만든 구분(廏糞), 작물 자체를 시비재료로 활용하는 작물비(作物肥) 등이 포함되었다. 수전에서 경작하는 벼와 한전에서 재배하는 여러 가지 잡곡이 모두 시비 대상이었다. 그리고 시비 시기는 종자에 시비재료를 묻는 방식을 채택한 만도(晩稻) 건경(乾耕)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작물의 경우 초경(初耕)한 후 파종하기 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기경에서 파종으로 이어지는 전반적인 작업과정의 한 부분으로 시비법이 포괄되어 있었다.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비법(施肥法)에서 나타나는 획기적인 변화는 바로 인분의 이용이 더욱 집약화된 점이었다. 인분을 농경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시비법을 수록한 농서로 등장하는 것이 16세기 후반의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의 농법을 보여주는 『농가월령』이었다. 『농가월령』을 토대로 16세기 후반 상주 지역의 농법에서 시비법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자. 특히 고상안은 비료를 만들기 위한 조분(造糞)의 중요성을 특히 인분(대소변)과 관련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수도(水稻)의 시비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앙기에 대한 시비가 제일 강조되고 있는 점이었다. 『농가월령』 시비법에서 수도 시비방식은 기본적으로 기비(基肥)에 그치는 것이었다. 전토에서 수도가 자라고 있을 때 시비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추비로 파악할 수 있는 방식 자체가 전혀 없다. 그리고 『농사직설』에서 강조된 만도(晩稻) 수경(水耕)에 대한 강화된 시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서술 내용은 월령식 농서라는 특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월별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앞서 자세히 설명한 시비 작업의 내용을 다음 절기 등에서는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절기별 한전작물 시비작업을 살펴보하면 우선 맥류의 시비작업이 제일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8월중 추분의 추모맥을 파종하는 기사와 직접 연관되는 시비작업이 누락되어 있다. 수임앙을 이식하는 데에도 분회와 같은 구하기 어려운 시비재료를 사용하는 마당에 농가의 접식 곡물로 유용성이 대단한 모맥을 경작하는 데 시비가 수반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농가월령』 내용을 기사 내용 그대로 살필 때 가장 중요한 작물로 평가되는 춘경 모맥의 경우를 보면 분회·회(灰)·사토(沙土)·우마분 등을 기경 후 파종 전 또는 파종시에 시비재료로 넣어주고 있다. 춘경 위주의 맥 경작이 아니라면 당연히 추모맥의 경우도 춘경 모맥과 동등한 정도의 시비가 병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퇴비 만드는 작업이 거의 대부분의 농절 기간에 수행되고 있는데 이렇게 마련한 퇴비를 추모맥에 넣어 주지 않았을 리도 없다. 따라서 추분에 추모맥을 파종하는 과정에 병행된 시비는 우수와 경칩에 소개된 시비작업 내용을 참고하여 수행되는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변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나타난 시비법의 발달은 몇 가지 측면에서 더욱 심화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시비재료의 측면에서 인분 이용이 다양화되고 이것을 원료로 한 조비가 증가하고 있었다. 분회를 만들 때뿐만 아니라 야초(野草)나 호마각(胡麻殼) 등과 섞어서 비료를 만드는 방식에 인분을 이용하고 있었다. 또한 맥작의 성행을 반영하여 맥전에 시비하기 위한 조비 방법이 상당수 개발되고 있었다.

2번째로 시비 대상의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수전에서 나타난 이앙법의 확산과 보급에 결부시킬 수 있는 시비법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즉 이앙법의 기술체계의 발전에 발을 맞추어 앙기에 대한 시비 방식이 크게 다양화되고 강조되면서 바로 수도작에서 앙기의 시비재료로 분회가 사용되고 있었다. 본래 『농사직설』에서는 한전용 비료였던 분회가 수전에서는 이앙법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하면서 앙기의 시비원으로 진출하였다.

3번째로 시비 시기의 측면에서 기경하고 파종하는 경종의 중간단계로 자리 잡혀 있던 분전(糞田)이 점차 독립적인 농작업으로 자리를 차지하면서 변화와 발전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작물이 경작지에서 자라고 있는 동안에도 시비재료를 넣어 주는 추비가 확산되고 있었다. 17세기 초반에 편찬된 『농가월령』은 잡령(雜令) 항목에서 시비기술을 소개하고 있었다. 월령식 서술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시비에 관련된 조목을 종합하여 잡령 항목을 설정한 것이었다. 18세기 초에 홍만선(洪萬選)이 편찬한 『산림경제』 치농(治農)은 시비기술과 연관된 여러 조목을 하나로 묶어 독립시키고 수분(收糞)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였다. 즉 택종(擇種)과 경파(耕播) 중간에 수분이라는 시비기술에 관련된 항목을 새롭게 집어넣고 있었다. 『산림경제』의 치농 이후 농서 편찬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시비기술의 독립항목화가 성립되었다.

의의

작물을 경작하는 데에 있어 시비는 한 해 또는 두 해씩 경작지를 쉬게 하면서 경작하는 휴한농경(休閑農耕)에서 매년 계속해서 같은 전지를 경작하는 연작상경(連作常耕)을 실행하기 위한 전제의 하나였다. 시비작업은 전답의 토지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을 확보하고 계속적인 토지 이용에 따른 지력 회복을 위하여 비료재료를 만들어 경작과정 중에 조달하는 농작업이었다.

15세기 초반 전답의 시비작업에 사용하는 비료의 종류가 중국과 거의 비등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15세기 이래 시비재료의 하나였던 인분을 16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비에 이용하게 된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17세기에는 인분의 이용이 다양화되면서 조비(造肥)가 늘어났고, 18세기에는 추비법(追肥法)이 전개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시비기술은 논과 밭을 막론하고 기경과 파종을 전후하여 비료를 넣어주는 기비법에서 농작물이 전답에서 자라고 있을 때 비료를 넣어주는 추비법으로의 발전을 나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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