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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8 기준 최신판



국가 제사 중 정사(正祀)에서 가장 등급이 낮은 제사들의 분류명.

개설

국가의 정사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되는데, 소사는 가장 등급이 낮은 제사들의 분류명이다. 제사 종류로는 풍사(風師)·우사(雨師)·뇌신(雷神)·영성(靈星)·영제(禜祭)·사한(司寒)·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주현문선왕묘(州縣文宣王廟)·칠사(七祀)·노인성(老人星)·명산대천(名山大川)·마제(禡祭)·포제(酺祭)·둑제(纛祭)·여제(厲祭)·계성사(啓聖祠)·관왕묘(關王廟)·선무사(宣武祠) 등이 있는데,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이 제사의 구분은 고제(古制)를 참용하여 정해진 것으로서, 대체로 인간의 생활과 국가의 안녕에 관여하는 신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소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제사조에 처음 보인다. 그 대상을 보면, 고성군(高城郡) 상악(霜岳), 수성군(䢘城郡) 설악(雪岳), 근평군(斤平郡) 화악(花岳), 칠중성(七重城) 감악(鉗岳), 북한산주(北漢山州) 부아악(負兒岳), 월내군(月奈郡) 월내마(月奈岳), 무진주(武珍州) 무진악(武珍岳), 백해군(伯海郡) 난지가현(難知可縣) 서다산(西多山), 내토군(奈吐郡) 사열이현(沙熱伊縣) 월형산(月兄山), 만노군(萬弩郡) 도서성(道西城), 진례군(進禮郡) 단천현(丹川縣) 다노악(冬老岳), 급벌산군(及伐山郡) 죽지(竹旨), 굴자군(屈自郡) 웅지현(熊只縣) 웅지(熊只), 우진야군(于珍也郡) 악발(岳髮), 생서량군(生西良郡) 우화현(于火縣) 우화(于火), 대성군(大城郡) 삼기(三岐). 모량(牟梁) 분황(卉黃), 사량(沙梁) 고허(高墟), 삼년산군(三年山郡) 가아악(嘉阿岳), 아지현(阿支縣)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 퇴화군(退火郡) 비약악(非藥岳), 가림현(加林縣) 가림성(加林城), 청주(菁州) 가량악(加良岳), 서술(西述, [牟梁]) 등이었다. 모두 산천에 속하는 24~25개처로, 이 가운데 가림성의 경우 논란이 있어 다른 책에는 영암산(靈嵒山)·우풍산(虞風山)이 있고 가림성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최윤의(崔允儀)의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서 소사는 풍사·우사·뇌신·영성·사한·마조·선목·마보·마사·칠사·영제·주현문선왕 등이었다. 그 후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의 소사는 『상정고금례』와 거의 동일하였지만, 칠사는 제외하였다. 칠사를 제외한 것은 칠사가 종묘의 부속제사로 편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종묘의 사시제향의(四時祭享儀)에는 칠사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조 후반에 새롭게 정비되다가, 『세종실록』「오례」에서 풍운뇌우신은 중사로 승격되어 제외되고, 소사는 영성·명산대천·사한·마조·선목·마보·마사·칠사·영제 등이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노인성·마제·포제·둑제·여제 등이 추가되었다. 영조 연간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계성사와 관왕묘, 선무사가 추가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산천단과 전사악진해독·명산대천·사한·마조·영제·포제·둑제·여제·계성사·사현사(四賢祠) 등으로 변화되었다.

절차 및 내용

1) 노인성

노인성은 고려시대에는 잡사에 속하여 2월과 8월에 남교 혹은 남단에서 흔히 설행되었다. 노인성은 추분일 아침에 병방(丙方)에서 나타나고 춘분일 저녁에 정방(丁方)으로 사라진다는 별이다. 이 별이 출현하면 다스림이 평안해지고, 수명을 주관한다고 하여, 고려시대 이래로 춘분과 추분 두 차례에 걸쳐 남교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이르러 노인성 제사는 1411년(태종 11) 정월에 거론되었는데, 이때 제단 시설과 희생(犧牲) 사용법을 『문헌통고(文獻通考)』의 내용에 따라 고쳐 정하자는 제안에 대해, 제사 시일은 추분으로 한정하고 희생은 불에 태워 연기가 오르도록 하였다. 또한 제단의 체제는 송의 『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에 따라 만들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월 11일). 그렇지만 아직까지 노인성 제사의 지위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 그러다가 1426년(세종 8)에 이르러 소사에 준하는 지위로 격상되었다(『세종실록』 8년 5월 19일). 노인성 제사에는 각성(角星)과 항성(亢星) 두 별자리의 제사를 그 앞에 병설하던 것을 혁거하고, 제사 물품은 소사의 예에 의거하도록 한 것이다. 『국조오례의』에 실린 노인성 제사에 대해 살펴보면, 정기 제사일은 추분일이며, 축판에는 ‘남극노인성지위(南極老人星之位)’라 쓰고, 제단은 남교에다 영성단 체제와 같이 만든다고 하였다.

2) 명산대천

산천제는 고려시대에 잡사에 속하여 제단에서 행해지지 않고 거의 사당에서 행하는 기양의식이었다. 게다가 경내의 산천에 대하여 각기 봉작을 가하고, 혹은 처첩·자녀·생질의 상(像)을 설치하여 모두 제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에 이르러는 중앙의 경우 해당 관사에서 월령의 규식에 따라 거행하고 지방의 경우 수령(守令)의 책임하에 춘추 두 차례에 걸쳐 제사하도록 하였다. 1392년(태조 즉위) 8월에 예조(禮曹) 전서(典書)조박(趙璞)이 언급한 것처럼, 산천은 국가의 상전(常典)이니 월령의 규식에 따라 유사에서 때에 맞춰 거행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11일).

그런데 1393년(태조 2)에 명산대천과 성황신에 대한 봉호가 요청되기도 하였지만, 사전(祀典)의 개혁과 정비는 태종조에 활발하였다. 1411년(태종 11) 5월에 산천은 『홍무예제(洪武禮制)』에 따라 성황과 풍운뇌우신과 합사의 형태로 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5월 8일). 풍운뇌우신을 중앙에 두고 산천신과 성황신을 좌우에 두는 형태였다. 1413년(태종 13) 6월에는 산천·해도(海島)의 신 역시 주신 1위만을 남겨 두고 모두 나무로 만든 신주에 쓰기를, ‘모해·모산천지신(某海·某山川之神)’이라 하고, 그 상설물은 모두 다 철거하여 사전을 바르게 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소사로 삼았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세종실록』 「오례」에 의하면, 소사에 포함된 명산은 강원도 원주의 동쪽의 치악산, 충청도 공주 계룡산, 충청도 단양 죽령산(竹嶺山), 경상도 울산 우불산(于弗山), 경상도 문경 주흘산(主屹山), 전라도 전주 성황(城隍), 전라도 나주 금성산(錦城山), 한성부 안 목멱산,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황해도 해주 우이산(牛耳山), 경기 적성(積城) 감악산(紺嶽山), 강원도 회양 의관령(義館嶺), 함경도 영흥 성황이었다. 그리고 대천은 충청도 충주 장진명소(場津溟所), 경기 양주 양진(楊津), 황해도 장연 장산곶(長山串), 황해도 안악 소재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 평안도 안주 청천강(淸川江), 평안도 평양부 우진익수(九津溺水), 강원도 회양 덕진명소(德津溟所), 함경도 영흥부 비류수(沸流水)이었다.

3) 마제

마제는 천자나 제후가 출정하거나 전수(田狩) 혹은 강무(講武) 때에 병사를 위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 건국 초에 시행된 강무 때에 마제를 지냈으나, 이 제사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를 주신으로 하였다. 이것이 세종조에 의주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제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개정하게 되었다. 1424년(세종 6) 2월 『통전(通典)』에서 주나라 때의 마제는 “정벌하는 지방에 이르러 제사지낼 때에는 황제와 치우(蚩尤)로 하고, 전수 때에는 치우만을 제사한다.”고 한 사실에 근거하여, 예조에서는 강무 때의 마제는 치우만을 제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2월 7일). 같은 해 9월에는 마제 의주가 제정되어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되고,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이어졌다.

『국조오례의』를 보면, 마제는 그 주신이 치우이며, 제사 시일은 강무를 하기 하루 전이고, 의주는 선목·마사·마보·포제와 같다고 하였다. 신위에는 곰 가죽 자리를 깔고 활과 화살을 앞에 놓으며 활꽂이를 뒤에 세우고, 큰 깃발 둘을 남문 밖 유문에서 10보 거리에 세운다고 하였다.

4) 포제

포제는 포신에게 드리는 제사로서, 포신은 사람과 사물에 재앙을 내린다는 신이다. 포제의 설행은 대체적으로 황충의 재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데서 이루어진 기양의례의 성격을 지녔다. 그에 관한 논의는 1408년(태종 8) 7월 황충의 재앙이 심각하여지자, 예조에서 포신에 대한 제사의식을 마련하면서 비롯되었다(『태종실록』 8년 7월 17일). 이때에는 포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었던 터라, 송 고종 때 예부(禮部) 태상시(太常寺)에서 포제에 관련하여 올린 보고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이 포제는 대략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황충이 있는 주군에서 행하여 기양하도록 하였다. 서울에서는 마보단에 나아가서 제사하고, 바치는 물품과 제복(祭服)을 마보에 제사하는 예를 따르도록 하였다. 지방의 주군에서는 제사하기 편한 방향을 택하여 땅을 골라 표를 세우고 노끈을 매달아서 제단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포제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메뚜기가 발생하는 경우에 제사하는 비정기제사였다.

5) 둑제

둑제는 군기(軍旗)인 독을 만들어 이를 제사하는 것이다. 이 제사는 고려 충렬왕 이후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때에는 잡사에 속하였다. 고려가 몽고와 강화한 이후 일본 정벌을 단행하기에 앞서 둑을 세워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공민왕대부터 정규의 제사의 모습을 보이나 이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420년(세종 2)의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 만들도록 한 홍색과 흑색 둑기 둘을 이때에 완성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관(祭官)과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을 입었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 7월에는 춘추의 둑제가 대중소의 구분이 없어 미편하다고 하여, 소사의 예에 따라 제사 의례를 정비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년 7월 19일).

이때의 제사 의례는 『홍무예제』를 준용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지방의 수어관(守禦官)은 모두 관청 청사 뒤에 대를 쌓고 기독묘(旗纛廟)를 세우고 군아(軍牙)와 여섯 독신(纛神)의 신위를 설치하여 놓고 봄철의 제사는 경칩 날에 지내고, 가을철의 제사는 상강(霜降) 날에 지내며, 제물은 양 1마리, 돼지 1마리, 비단 1필인데 흰빛을 사용하며, 축문 1장, 향·촛불·술·과일이다. 제사가 있기에 앞서 모든 관리는 하루 동안 재계를 드리고, 제사지내는 날이 되면 수어장관(守禦長官)은 무관복(武官服) 차림으로 삼헌(三獻)의 예를 집행한다. 만일 군대를 출동할 때에는 기둑(旗纛)을 내어 놓고 제사를 지내며, 군대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대로 사당 안에 들여 둔다. 의주(儀注)는 사직(社稷)에서와 같다.’고 하였다. 그 후 둑제 의주는 1440년(세종 22) 6월에 제정되었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6) 여제

여제는 제사가 없는 귀신[無祀鬼神]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여제의 설행은 1401년(태종 1) 정월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권근(權近)이 시무와 관련하여 올린 상서 중에 그 시행을 청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옛날부터 무릇 백성에게 공이 있거나 죽도록 일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제사 없는 귀신도 또한 태려(泰厲)·국려(國厲)의 법이 있습니다.”라 하면서 그 시행을 건의하였다(『태종실록』 1년 1월 14일). 그리하여 주현이나 각 100호를 단위로 하는 향리에서 매년 봄의 청명, 가을의 7월 15일, 겨울의 10월 1일 세 차례에 걸쳐 제사 없는 귀신을 제사하도록 되어 있는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1404년(태종 4) 6월에 여제 의주가 제정되었다(『태종실록』 4년 6월 9일). 제단은 북교에 설치하고 제물은 서울과 주군현에 따라 차등을 두도록 하는 등 제일과 제단의 설치 장소, 희생 등에 관한 규정이 모두 『홍무예제』와 같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여제가 국가의 정사에 오르지 못하다가 1440년(세종 22) 6월에 이르러 드디어 사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기일에 앞서서 발고제를 성황단에서 하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7) 기타

고려시대의 소사 중에서 영제는 오랜 장마가 질 때 지내는 제사이다. 『상정고금례』에는 경성의 여러 문에서 지내는데 문별로 3일을 매일 한 번씩 지내고,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산천과 악진해독에 빌고, 3일을 해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빌며, 주현에서는 성문에서 지내고 경계 내의 산천에 빈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오례」를 보면, 정기 제사로서 중류(中霤)는 계하 토왕일(土旺日), 영성은 입추(立秋) 후 진일(辰日), 마조는 중춘(仲春) 중기(中氣) 후 강일(剛日), 선목은 중하(仲夏) 중기 후 강일, 마사는 중추(仲秋) 중기 후 강일, 마보는 중춘(仲春) 중기 후 강일이며, 비정기 제사로서 사한은 섣달에 장빙(藏氷)하고 춘분에 개빙(開氷)하면서 제향한다. 영성단은 규모가 너비 2장1척, 높이 2척5촌, 1유(壝) 한 개였으며, 마조단과 선목단, 마사단, 마보단은 너비 2장 1척, 높이 2척 5촌, 유 한 개였다.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제사의 규례를 살펴보자. 재계(齋戒)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이다. 행례(行禮) 절차는 영신(迎神), 전폐(奠幣),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음복수조(飮福受胙), 철변두(撤邊豆), 송신(送神), 망예(望瘞) 혹은 망료(望燎)를 기본으로 하여 헌관(獻官) 1명이 삼헌례를 행한다. 다만 사한과 영제, 여제의 경우는 일반 소사와 다르다. 사한은 전폐와 망예가 없으며, 음복례에 수조가 없다. 영제는 전폐와 음복, 망예가 없으며, 삼헌이 아닌 일헌례이다. 여제는 본 제사에 앞서서 성황신에게 발고제로서 삼헌례를 행한 후, 무사귀신의 신위에 삼헌례를 행하고 이때 제문을 읽도록 되어 있다.

축문식에서 각 신의 이름은 영성은 영성지신, 영제는 모방산천지신(某方山川之神), 사한은 현명지신(玄冥之神), 마조는 천사지신(天駟之神), 선목은 선목지신, 마사는 마사지신, 마보는 마보지신, 칠사는 사명·사호·사조·중류·국문·공려·국행지신(司命·司戶·司竈·中霤·國門·公厲·國行之神), 마제는 치우지신(蚩尤之神), 포제는 포신, 둑제는 둑신이라 하였다. 제물은 8변두(籩豆)이며, 등과 형은 쓰지 않았다. 희생은 전생서(典牲署)에서 10일 동안 기른 돼지만을 사용하며, 둑제와 여제에서는 양을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음악은 사용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 金海榮, 『조선초기 제사전례 연구』, 집문당, 2003.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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