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혈(假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2:20 기준 최신판



겉으로는 진혈(眞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터를 잡을 수 없는 곳이라 종종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는 가짜 혈.

개설

풍수상 길지처럼 보여 사람들이 쉽게 속는 땅이다. 진혈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를 누리지만, 가혈에 터를 잡으면 재앙이 생겨 집안이 몰락한다고 한다. 그러나 가혈이라 할지라도 주산(主山), 내룡(來龍), 주변을 감싸는 산들이 모두 아름답기 때문에 진혈인지 가혈인지 구별이 어렵다. 그러한 까닭에 해당 터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초 경복궁 터에 대한 진혈·가혈 논쟁이다.

내용 및 특징

가혈은 지기가 뭉치지 않아 쓸 수 없는 땅임에도 진혈과 너무 유사하여 쉽게 그 진위를 가리지 못한다. 주변을 살펴보면 아름답고 유정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혈이 아니다. 진혈과 가혈은 관(官), 귀(鬼), 요(曜), 금(禽) 등과 같은 산의 있고 없음을 가지고 구별하기도 한다. 조선조 상지관 선발 고시과목인 『의룡경(疑龍經)』이 비교적 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구비하면 진혈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갖추지 못하면 길흉화복이 달라지는 것으로 본다. 한 개인의 집터나 무덤 터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왕이 거처하는 궁궐일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가혈이 아니고 진혈처에 궁궐터를 잡아야 왕실이 번영해서 백성과 국가가 튼실해질 뿐만 아니라 천수도 누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1433년(세종 15) 경복궁 터를 둘러싸고 진혈·가혈 논쟁이 발생하였다. 풍수학인 최양선(崔揚善)이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목멱산에서 바라보면 향교동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않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이라는 상소를 왕에게 올리면서 논쟁이 시작된다(『세종실록』 15년 7월 3일). 즉 경복궁터가 가혈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경복궁의 명당 여부에 대해 대신들에게 직접 살피라는 지시를 내린다. 왕의 명을 받은 안숭선(安崇善)은 황희(黃喜), 신상(申商) 등과 함께 직접 목멱산에 올라가 경복궁 뒷산인 북악산 능선을 살피면서 동시에 여러 상지관 등으로 하여금 의견을 개진하게 하였다.

이때 이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경복궁이 진혈이라고 주장하는 이양달(李陽達), 고중안(高仲安), 정앙(鄭秧) 등의 의견과 이를 부정하는 최양선, 이진(李蓁) 등으로 서로 대립된다. 경복궁의 명당 여부에 대한 논쟁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진행되는 동안 예조 좌참판권도(權蹈)는 그러한 논쟁 자체가 풍수지리라는 한갓 망령된 술수에서 나온 것이니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한다. 그 후 논쟁은 잠시 주춤하다가 1464년(세조 10)에 다시 최양선이 경복궁 진혈 여부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자 당시 풍수학인 최연원(崔演元)이 이를 반박하기도 한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그 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270여 년 동안 잡초에 묻히자 경복궁 진혈·가혈 논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참고문헌

  • 『의룡경(疑龍經)』
  • 김두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최창조, 『한국의 풍수지리』, 민음사, 1993.
  • 梁湘潤(編集), 『堪輿辭典』, 台北, 民國 85年.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