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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원비(元妃) 공혜왕후의 능.

개설

공혜왕후(恭惠王后)는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나중에 성종으로 등극하는 자산군(慈山君)과 가례를 올렸다. 1469년(예종 1) 11월에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1474년(성종 5) 4월 1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다. 그해 6월 7일 예종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인 공릉(恭陵)과 마주한 언덕의 묘방(卯方)을 등지고 유방(酉方)을 향해 앉은 자리, 즉 동쪽에서 서쪽을 향한 자리에 안장되었으며, 시호는 공혜(恭惠), 능호는 순릉(順陵)이라 하였다(『성종실록』 5년 6월 7일). 순릉은 공릉·영릉(永陵)과 함께 ‘파주삼릉(坡州三陵)’으로 불린다.

조성 경위

공혜왕후는 1456년(세조 2) 10월 11일, 한명회(韓明澮)의 막내딸로 연화방(蓮花坊) 사저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지만, 1474년(성종 5) 4월 15일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성종실록』 5년 4월 15일).

조성 상황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창덕궁 낙선재 자리인 광연정(廣延亭)에 빈소를 설치하고, 4월 22일에 공릉을 을방(乙方)으로 내려온 산맥의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순릉의 터를 잡았다(『성종실록』 5년 4월 18일)(『성종실록』 5년 4월 22일).

변천

1648년(인조 26)에 혼유석 및 문·무인석과 장군석의 코끝이 깨어졌고, 정자각의 신문(神門)이 부서져 파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석물을 모두 새것으로 바꿀 경우 능 위의 섬돌과 사초도 걷어 내야 하는 큰 공역이 되므로 석물을 약간만 깎아 내는 방법으로 보수하였다. 이는 순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건원릉(健元陵)의 문인석과 무인석보다 몸체가 조금 커서 가능했을 뿐 아니라, 선릉(宣陵)의 석물이 깨졌을 때 석회를 발라 보수했던 일을 근거로 삼아 일부 보수하여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이다(『인조실록』 26년 윤3월 13일).

1817년(순조 17)에 세운 순릉의 표석에는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고 쓰여 있다. 1870년(고종 7)에는 정자각을 헐고 새로 지었는데, 공사가 기신제인 4월 15일까지 미처 완성되지 않아 정자각 윗자리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기신제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에서 작성한 『순릉속지(順陵續誌)』 도설의 배치도에는 순릉의 사초지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과 수라간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자각과 비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1698년(숙종 24)에 정자각을 중건한 기록이 추가되어 있으며, 재실의 경우 1870년(고종 7)에 중건한 기록이 있는데 『고종실록』에 보이는 정자각 공사와 더불어 재실 중건 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사항

파주행궁은 왕이 공릉·순릉·영릉·장릉(莊陵) 등에 거둥할 때 유숙하던 곳이다(『순조실록』 8년 8월 9일).

참고문헌

  • 『공순영릉공문접수(恭順永陵公文接受)』
  • 『순릉속고(順陵續攷)』
  • 『순릉속지(順陵續誌)』
  • 『순릉수개도감의궤(順陵修改都監儀軌)』
  • 『순릉영릉도이(順陵永陵圖而)』
  • 『순릉축식(順陵祝式)』
  • 문화재청, 『공릉·영릉 비각 수리보고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