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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0 기준 최신판



조선 태조의 조부인 도조이춘의 능.

개설

도조(度祖)이춘(李椿)의 아버지는 익조(翼祖)이행리(李行里)로, 원나라의 천호(千戶)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등주(登州)호장(戶長)최기열(崔基烈)의 딸로, 이행리가 첫 부인 손씨(孫氏)의 사후에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었다. 이춘은 아버지의 천호 관직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

박광(朴光)의 딸과 혼인하여 이자흥(李子興)과 환조(桓祖)이자춘(李子春)을 낳았고, 얼마 뒤 박씨(朴氏)가 죽자 쌍성총관(雙城總管)의 딸 조씨(趙氏)와 재혼한 뒤 의주에서 화주(和州), 즉 함흥으로 옮겼다. 1342년(고려 충혜왕 3)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나 함흥부(咸興府)에 안장되었다[『태조실록』 총서]. 1392년(태조 1)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4대조의 존호를 정할 때 도왕(度王)으로 추존되었으며, 1411년(태종 11) 종묘에 올리는 존호를 도조로 하였다.

조성 경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 아들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4대 조상의 능에 제사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게 하였다. 이때 각 능의 능호를 정해 올렸는데, 조부인 도조의 능은 ‘의릉’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8일).

조성 상황

의릉은 함흥부 동쪽 14리 지점인 예안부(禮安部) 운천동에 위치하였는데, 임좌병향(壬坐丙向) 즉 동남쪽을 향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함흥부]. 1392년(태조 1)에는 능지기 권무(權務) 2명을 두고, 능을 지키는 민호를 몇 가구 두고 재궁을 세웠다(『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표석을 세웠다고 했다. 19세기 초반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중에서 의릉을 그린 도형에는 곡장과 혼유석, 장명등, 문무인석, 마석(馬石), 정자각, 수라간, 재실, 홍살문, 샘, 석비(石碑)가 갖추어져 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석물과 능상을 지속적으로 보수하였다. 1746년(영조 22), 1791년(정조 15), 1806년(순조 6)에 각각 석물을 수개하였으며, 1858년(철종 9)에는 능상을 수개하였다. 1873년(고종 10)에도 능을 보수하였다.

관련 사항

도조의 비 박씨는 1392년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이듬해에는 능호를 순릉(純陵)으로 정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8일). 1411년(태종 11) 경순왕후(敬順王后)로 추존되었다. 순릉은 의릉과 떨어져 있었는데, 함흥부 동쪽 33리 거리인 예안부 대구지동(大仇只洞)의 감산(坎山)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함흥부].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태조의 4대조 능과 관련 사적지를 그린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목조(穆祖)와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덕안릉(德安陵), 익조의 지릉(智陵), 정숙왕후(貞淑王后)의 숙릉(淑陵), 도조의 의릉,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순릉, 환조(桓祖)와 의혜왕후(懿惠王后)의 정화릉(定和陵)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