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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긴급한 공문서, 또는 변경 지역의 위급한 군사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 통신 기관.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의 통신 제도인 봉수제(烽燧制)와 역참제는 적정의 위급함을 알리는 데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중앙과 지방 사이에 긴급한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변경의 위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전달할 새로운 통신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97년(선조 30) 1월에 왜군이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대를 통해 알게 된 파발제를 도입하였다. 지역에 따라 서발·북발·남발 등 3개 노선을 두었으며, 전송 수단에 따라 기발(騎撥)은 25리마다 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다.

파발참은 각 도의 관찰사 혹은 병마절도사의 휘하의 각 읍에 위치하였다. 전국적으로는 약 205개의 발참이 있었는데,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서발(西撥), 한양과 함경북도 서수라를 연결하는 북발(北撥), 한양과 동래를 잇는 남발(南撥) 등 3개의 노선으로 나뉘었다. 서발은 기발(騎撥), 북발과 남발은 보발(步撥)이었다. 기발의 경우 참마다 발장(撥長) 1명, 색리(色吏) 1명, 군졸 5명, 말 5필이 배치되었다. 그에 비해 보발은 참마다 발장 1명, 군졸 2명이 배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중앙과 지방 사이에 긴급한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변경에서 중앙으로 위급한 군사 정보를 신속히 알리기 위해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파발참에는 발장과 발군(撥軍)이 배치되어 있었다. 발장은 그 지역 출신의 글을 아는 자로 임명하였는데, 직첩을 만들어 주고 삭료(朔料)를 지급하였다. 그뿐 아니라 권관(權管)의 예에 따라 근무 일수 50삭(朔)이 차면 정6품 사과(司果)로 승진하게 하였다.

발군은 양인 출신의 정병(正兵) 가운데 젊고 민첩하며, 말을 잘 몰고 무예를 갖춘 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등 거듭된 전란을 거치면서 잡색군(雜色軍), 궤군(潰軍), 노잔군(老殘軍), 방군(防軍), 속오군(束伍軍), 정초군(精抄軍), 장무대(壯武隊), 관군(官軍), 무학군(武學軍), 유청군(有廳軍) 등이 발군에 충당되었다.

전국의 파발참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파발로와 함께 정리되어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상호, 「조선시대 파발제-군사통신제 발달」, 『韓國軍事史 13』,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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