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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실록 편찬을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왕이 승하하면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 등이 설치되어 왕의 장례를 분담·처리하였다. 빈전도감에서는 인산 일까지의 습(襲)·염(殮)·성빈(成殯)·성복(成服) 등의 일을, 국장도감에서는 장례 의식에 관한 재궁(梓宮)·거여(車輿)·책보(冊寶)·복완(服玩)·능지(陵誌)·명기(明器)·길흉·의장·제기·포연(鋪筵)·제전(祭奠)·영로(迎虜)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산릉도감에서는 현궁(玄宮)·정자각·비각·재실 등 왕의 유택(幽宅) 및 영건 사무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기관들은 선왕의 육신이 이승을 떠났으므로 왕의 지위에 맞는 예우와 절차에 따라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아간 선왕의 육신을 모시기 위한 국장 절차가 진행되는 중에 재위 시의 역사 사실을 정리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이것이 실록의 편찬이다. 실록의 편찬은 국장도감 등과 마찬가지로 임시 기구인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한 뒤, 총재관인 영의정부터 말단의 사관(史官)까지 편찬관으로 참여시켜 완성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국책 사업의 하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기록된 내용을 정리·편찬하기 위한 사관(史館)의 설치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사관은 고려 초기에 설치되었다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며, 처음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점차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사관의 설치로 사관에 의한 역사 기록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실록의 편찬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였고 현실에 맞는 대안을 강구한 것으로서 의미가 크다.

고려시대 사관의 직제 중 감수국사·수국사·동수국사 등은 총재관으로서 실록 편찬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이들은 기록과 자료의 정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실록 편찬을 주도하고 사론을 작성하였다. 수찬관은 기록된 문헌 자료를 정리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일력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사고(史藁)를 작성하였으며, 실록의 본문 서술을 담당했다. 직사관은 왕의 언행을 사고로 작성하였고, 밤에는 궁중에 입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완성된 실록과 사료의 보관·관리 임무를 담당하였다.

고려 실록의 편찬 방식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칠대실록(七代實錄)』 이후 『숙종실록(肅宗實錄)』까지는 감수국사 혹은 수국사의 책임 아래 사관 및 수찬관이 편찬하였으며, 『예종실록(睿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은 사관이 아닌 사람에게 별도로 편찬관을 겸임시켜 편찬하도록 하였다. 후자는 사관 관서가 비적실록(秘籍實錄)의 보관 임무를, 편수원(編修院)이 수찬·저술하는 송나라의 제도를 수용한 결과로 당나라 방식에서 송나라 방식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의종실록(毅宗實錄)』부터 전자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고려와 조선의 실록 편찬 방식의 차이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편찬관이 실록 집필의 직접적 책임을 졌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각 방의 사관이 초고 작성의 책임을 졌다. 겸직 운영에서는 고려시대에는 인물 본위로 선정하여 겸직시켰고, 조선시대에는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편찬 방식에서는 고려시대에는 연속하여 몇 년씩 집필하였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편성된 방의 수만큼 해를 나누어 담당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편찬관의 구성에서는 5개 직임의 고려와 8개 직임의 조선이 서로 다르다.

조선시대 실록청은 총재관은 정1품으로 춘추관의 영사나 감사가 임명되었고 이하에 수사관(修史官)을 두었다. 춘추관 수찬관 이하가 재직 시 견문한 정사·인물의 현부득실·비밀사를 기록하여 사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수납한 사초[家藏史草]와 춘추관 시정기(時政記)·각사등록·조보·개인 일기·소·초 및 문집 등을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이들 자료 외에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 등의 자료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 중 실록 편찬의 주요 자료가 되는 것은 시정기와 수찬관 이하가 제출한 사초였다.

사관의 업무는 춘추관에 수납하는 사초와 실록청에 수납하는 가장사초의 작성 및 『승정원일기』를 등록하는 것이었다. 등록은 승정원에 입직한 검열이 담당했다. 그 외의 육승지 이하는 춘추관 수찬관 등 많은 관직을 겸하였기 때문에 그 질과 양에서 사관의 사초와는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사초 중에서도 사관의 사초가 중심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사초의 수납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수납자에게는 벌금 은 20냥을 부과하고, 문종 이전에는 자손을 금고하였다. 또 단종 이후에는 본인을 서용하지 않는 등의 벌칙을 규정하여 실행하였다.

실록의 편찬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사관의 사초를 비롯하여 실록청에 납입된 광범한 자료는 실록청의 각 방(房)에 편성된 당상과 낭청에 의해 일단 편년순으로 정리된다. 이것이 초초(初草)이며, 초초를 도청에 넘기는 것으로 방의 임무는 끝난다. 도청의 낭청은 방에서 올라온 초초를 살펴, 잘못된 곳을 정정하고 빠진 곳을 추가하며 불필요한 곳을 삭제한 뒤 당상에게 올린다. 당상의 검토가 끝나면 2차 원고인 중초(中草)가 마무리된다.

총책임자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 등이 중초를 검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하고 필삭을 가한 뒤 정초(正草)가 완성되면 실록 편찬이 마무리된다. 이러한 절차와 과정은 당대사가 정리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모든 시행사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지배층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직결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실록청의 조직은 대체로 영의정이 겸하는 영사, 좌의정과 우의정이 겸하는 감사, 판서급이 겸하는 지사, 참판급이 겸하는 동지사, 육승지와 홍문관 부제학 및 대사간이 겸하는 수찬관으로, 이상은 당상관이었다. 그리고 의정부·육조·승정원·홍문관·예문관·세자시강원·사헌부·사간원·승문원·종부시의 당하관이 겸하는 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인원은 왕의 재위 기간에 따라 작업량이 다르므로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실록청은 『숙종실록』을 편찬할 때인데 당상관 68명, 당하관 188명 등 모두 256명이었다.

실록청의 최고 책임자는 초기에는 영사 또는 감사였으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편찬할 때부터 총재관이라 하였다. 실록 편찬의 작업과 관련해 실록청의 조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인조실록(仁祖實錄)』 권말에 부기된 편찬 담당자의 명단을 통해 대강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는데 총재관은 영춘추관사, 도청 당상에는 지춘추관사와 동지춘추관사, 도청 낭청에는 편수관을 비롯해 기주관·기사관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삼방(三房)으로 나누어 각 방 당상은 지춘추관사·동춘추관사·수찬관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방 낭청에는 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대체로 도청이 실록 편찬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지춘추관사부터 수찬관이 당상에, 편수관부터 기사관이 실무관인 낭청으로 편성되었다. 방에도 여러 명의 당상과 낭청이 편성되었는데 왕의 재위 기간이 길면 세종·성종대처럼 6개 방, 짧으면 세조·명종대처럼 3개 방으로 편성했다.

조선의 실록 편찬 방식은 고려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세분화하여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무의 분장도 구체적이었다. 먼저 총재관인 영사는 의정부의 삼정승이 겸했는데, 실록 편찬의 총책임을 담당하였다. 비록 중국의 제도 운영에 대한 논의이지만, 유지기(劉知幾)의 언급을 보면 총재관이 실록 편찬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고 사관이 편찬의 실무를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기 총재관이었던 감수국사와 수국사, 동수국사 등의 임무 역시 이와 유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삼정승도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영사와 감사 등 총재관을 겸하여 문장의 통일 및 사론 작성 등 실록 편찬의 책임을 담당했다. 그런데 중국에 없는 영사를 편성하는 등 세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겸임자를 광범하게 구성함으로써 업무의 분담을 통한 효율성 제고와 중요한 국책 사업을 국정 최고 책임자들에게 책임 지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수찬관은 1401년 7월 예문춘추관이 분리·독립하면서 태조대의 정8품 수찬이 예문관의 대교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1466년(세조 12) 1월 춘추관 제도를 정비하면서 충수찬관이 수찬관으로 고쳐졌고, 동지사 밑에 정3품의 당상관으로 보충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과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기록된 ‘수찬 이하 직관’까지의 인사들이 사초를 작성해야 한다는 기사와,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충수찬관 이하 각인의 사초’라는 기사는 1466년 관제 개정 이전의 정8품 수찬을 의미하는 것이다. 1453년(단종 1)의 기사에 ‘신해년에 안숭선이 쓴 사초’라는 표현이 있는데, 신해년인 1431년(세종 13) 당시 안숭선은 지신사 곧 승지였다. 여섯 승지가 수찬관을 겸했으므로, 품계의 고하와 무관하게 ‘수찬관 이하의 사초 작성’이라는 표현은 태조 이래 관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실록(文宗實錄)』까지는 수찬관이 편성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1466년에 수찬관이 정3품 당상관으로 개편되면서 실록청에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조 이전에 편찬된 실록은 지관사와 동지관사가 수찬관 임무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문종실록』까지는 수찬관 없이 지관사와 동지관사가 각 방의 책임자로 수찬을 책임졌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은 3개 방, 『예종실록』은 2개 방으로 나눈 뒤 수찬관이 각 방을 책임졌다.

정3품에서 종4품까지로 구성된 편수관은 편집과 수찬, 즉 도청과 각 방의 낭청에 편성되어 기사와 사론 작성의 임무를 수행했다. 춘추관의 관제는 영사·감사·기사관 등으로 구분되지만, 실록청은 총재관·도청의 당상과 낭청, 방의 당상과 낭청으로 편성된다. 이때 편수관은 기주관·기사관과 함께 낭청에 편성되어 편찬 실무를 담당했고 일부는 당상에도 편성되었다.

정·종 5품관으로 겸임시킨 기주관에 대해 “견문을 밝게 하고, 기주를 상세히 하고자 함”이나, “문사 8인을 선발하여 사관이라 하여 실록을 담당하게 하고 또 대언·시신으로 하여금 사직을 겸하게 하여 날마다 좌우에 모시게 하였으니, 시사를 기주하는 직임이 넓다 할 만한 소이이니” 등의 실록 기사가 있다(『태종실록』 13년 1월 16일).

여기서 기주란 ‘상세하게 기록한다. 혹은 ‘철저하게 기록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기주관은 작성된 기사를 상세하게 보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록을 편찬할 때 ‘세주(細註)’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46년(세종 28) 기주관어효첨(魚孝瞻)과 기사관양성지(梁誠之)에게 『태조실록』의 내용 중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수록할 내용을 초록하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당시 어효첨은 종4품 집현전 응교, 양성지는 정6품 집현전 수찬이었다.

1446년인 세종 28년이면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런데 왜 기주관과 기사관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이 시기 전후로 「용비어천가」의 편찬이 있었던 점을 상기할 때, 「용비어천가」 내용을 보충하는 일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기주관은 실록을 비롯한 각종의 사서 편찬 시 본문 기사의 보완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변천

실록청은 단종대에 처음 마련되었고, 편찬관의 직제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이 시기에 비로소 당대사의 체계적인 편찬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록을 편찬하는 관례는 태종 때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종실록』을 편찬하면서부터 춘추관에 실록청이 새로 구성되었다는 첫 기록이 보이는데, 『세종실록』 편찬 때부터 실록청이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록청은 상설 기구가 아닌 임시 기구였으며, 춘추관원 모두 겸관으로 운영되었다. 춘추관과 마찬가지로 영관사·감관사·지관사·동지관사·수찬관·편수관·기주관·기사관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체제는 세조와 예종의 실록을 편찬할 때에만 갖추어졌다. 편찬 시기도 왕의 사후 곧바로 시행하거나 약간의 기간이 경과한 뒤 시행하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편찬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 또는 편찬 대상 왕의 재위 기간 및 업적이 달랐고, 춘추관의 제도적 장치가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의

조선시대의 사서 편찬은 고금에 통달해야 한다는 목적과 명교(名敎)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목적에 근거하여 진행되었다. 조선의 건국 이후 역사를 통하여 정통성 확립과 체제 유지의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 같은 요구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실록은 조선 당시에서 본다면 현대사에 해당한다. 당대 정치사를 당대인이 정리해야 했던 만큼 많은 관심과 주의가 요구되었던 사업이었다.

실록 편찬은 선왕대의 역사 사실을 정리한다는 의미 외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 확립과도 연관되는 일이었다. 편찬을 위한 임시 기구인 실록청의 설치와 편찬관의 구성은 왕으로부터 말단 관료까지 관심이 집중되었던 중대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을 중심으로 편년을 하고 사건을 정리하는 방식을 취했던 점에서 볼 때, 실록 편찬은 그 자체로 대표적인 국책 사업의 하나였다. 국상(國喪) 중 졸곡(卒哭)이 끝남과 동시에 편찬이 진행되는 관례가 만들어지면서 의례의 일부로, 또는 의례처럼 수행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실록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구성되고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별도의 의미와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즉 국가의 공식 시행사 일체를 실록으로 편찬하여 후대에 권계하려고 했던 만큼, 편찬을 위한 기관인 실록청의 구성과 운영은 당대 지배층의 투철한 기록 정신과 역사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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