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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성균관이 소장한 도서를 보관하던 전각(殿閣).

개설

존경각은 한명회(韓明澮) 등 여러 신하들의 건의를 성종이 받아들여 건립되었다. 장서 구성은 성균관의 교육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 장서는 사서(四書)·오경(五經)·여러 역사서[諸史]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 도서이다. 도서는 주로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도서를 분급 받는 방식으로 수집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존경각은 1475년(성종 6) 성균관의 도서를 보관하기 위해 관내에 지은 건물이다. 위치는 명륜당 뒤이다. 성균관의 서책을 보관하여 대사성 이하 학관(學官)과 유생의 열람을 대비하는 것이 그 설치 목적이었다. 그런데 문무과의 강경(講經) 때에 모두 성균관의 서책을 실어 와서 시험을 보다 보니 더러워지고 손상되거나 분실되는 책이 많아졌다. 이에 과거 시험에서 강서(講書)할 때에는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문무루(文武樓)의 서책을 가져다 쓰도록 바꾸었다(『연산군일기』 5년 8월 21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책이 없어져 정조 때에 이르면 층층이 있는 서가가 거의 비었다고 한다.

조직 및 역할

존경각은 서리(胥吏) 한 사람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장서가 많을 경우에는 수만 권에 이르기도 하였으며, 유생들이 언제든 대출해 갈 수 있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기휘(忌諱)할 만 한 서적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선조실록』 15년 11월 1일]. 성균관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할 때 시험 문제를 보관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0년 7월 7일].

변천

1514년(중종 9) 존경각에 불이 나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해 온 서책을 다 태워 버렸다. 임진왜란으로 그 후에 수집하여 소장한 장서들이 다시 소실되었으며, 그 대책으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새로 간행하고 있는 책들을 예조에서 행문(行文)하여 각 도에서 두세 질씩 올려 보내도록 하여 성균관에 간직해 두게 하였다[『선조실록』 37년 12월 2일]. 그러나 광해군 때에도 왜란 중에 존경각이 소실된 후 장서를 보관할 독립된 건물이 없기도 하였지만 ‘단지 낡고 더러워진 몇 권의 책이 있을 뿐’ 이라고 하였듯이 사정이 개선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3년 3월 18일).

1601년(선조 31) 성균관 중건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에 1차로 문묘·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중건된 데 이어, 1626년(인조 4)에 2차 공사로 존경각이 정록청·양현고·식당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북한산성에 있는 경서를 각기 2건씩, 운책(韻冊)을 5건씩 인쇄하여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매 권(卷)마다 보장(寶章)을 찍어서 존경각에 보관토록 하였다. 또 존경각 소장 서적들을 성균관 구임전적(久任典籍)이 관리하게 하되, 간수를 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곧 ‘나랏돈을 제대로 맡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법률[公貨不謹典守律]’로 논죄하도록 했다[『정조실록』 14년 2월 24일]. 1879년(고종 16)에는 존경각에 도적이 들어 312권의 책자를 분실하는 사건도 있었다.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 이춘희, 「존경각고」, 『대동문화연구』10,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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