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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6 기준 최신판



1684년(숙종 10) 함경도에 설치한 기병 부대.

개설

친기위는 1684년 우의정남구만(南九萬)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수한 기병 부대의 확보를 위해 함경도에 600명 정원으로 창설되었다. ‘삼번(三藩)의 난’ 등 중국 정세의 변동에 따라 군사적 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편성은 전통적인 기병 편제인 영정제(領正制)를 채택하여 10명을 1영(領)으로, 3영을 1정(正)으로 하였다. 군사의 선발은 천인을 제외한 모든 신분을 대상으로 하였고 매년 4회 시재(試才)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관직에 채용하였다. 18세기 전반기부터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어 정원이 꾸준히 늘어 19세기 전반기에는 4,1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84년 2월 외적 방어를 위해 함경도 군사들을 선발하여 새로운 기병 부대를 만들자는 우의정남구만의 건의를 받아들여(『숙종실록』 10년 2월 4일), 8월 「함경도친기위초택절목(咸鏡道親騎衛抄擇節目)」이 마련되며 창설되었다. 친기위가 창설된 주된 배경은 당시 대외 정세의 변동에 따른 외침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대 후반 청나라에 항복하였던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경정충(耿精忠) 등이 일으킨 이른바 삼번의 난으로 인해 중국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청이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밀려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경우 청의 잔존 세력인 여진족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가려 할 것인데 그 통로에 위치한 조선의 서북 지역이 유린당할 우려가 있어 그 대비책이 요구되었다. 아울러 대만(臺灣)에 근거지를 두고 반청 활동을 전개하던 정금(鄭錦)의 세력이 해로를 통해 조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어 해안 방어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 경우 해안에 상륙한 적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해 우수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 필요했다. 친기위의 창설은 이러한 군사적 상황하에서 이루어졌다.

조직 및 역할

최초 창설되었을 때 함경도 친기위의 정원은 600명으로 북관(北關)에 300명, 남관(南關)에 300명씩 배정되었다. 북관 친기위는 모두 북병사가 관장하던 10개 고을에서 가려서 뽑았으며, 남관 친기위는 남병사와 함경감사가 관장하던 고을에서 각각 150명씩 가려서 뽑았다. 기본 편제는 기병 편제인 영정제에 따랐는데, 이에 의하면 10명을 영으로 편성하고 지휘관으로 1명의 영을 두었다. 여기에 각종 잡일과 운반 등을 담당하는 화병(火兵) 1명과 복직(袱直) 1명을 두었다. 세 개의 영에 1정을 두고, 5개의 정에 1장(將)을 두었다. 이에 따라 장 1명, 정 5명, 영 15명과 기병 129명으로 편성된 150명이 한 전투 단위가 되었다.

친기위 군사들의 선발은 각 고을의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전직 조관(朝官), 출신(出身), 업무(業武), 무학(武學), 역리(驛吏), 평민(平民), 군역을 지고 있는 잡색인(雜色人) 등 천인을 제외한 모든 신분을 대상으로 하였다. 대상자 중에서 힘과 담력, 그리고 기마술, 궁시 등을 시험하여 친기위로 선발하였다. 이들을 보조하고 결원이 생길 경우 충원하기 위해 선발된 화병과 복직은 재주나 힘이 뛰어난 역노(驛奴), 관노(官奴), 공·사천(公·私賤) 중에서 기마술과 궁술을 시험하여 충당하였다. 친기위의 군사와 화병, 복직에게는 1인당 2명씩 보인(保人)을 배정하여 이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주도록 하였다. 아울러 궁시(弓矢), 환도(環刀), 편곤(鞭棍) 등 각종 병장기와 전마(戰馬)는 모두 관에서 지급하였다.

친기위 군사들은 1년에 네 차례, 즉 2·5·8·11월에 각자 소속된 감영이나 병영에 모여 전마와 군장의 검열을 받았고,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蒭)·편추(鞭蒭) 등 네 가지 과목의 무예 시험인 시재(試才)를 치러야 했다. 11월의 시재가 끝나면 네 차례의 시험 성적을 합산하여 북관과 남관에서 각각 성적 우수자 3명씩 모두 6명을 뽑아 병조(兵曹)에 보고하고, 병조에서는 이들을 변장(邊將) 등으로 등용하였다. 따라서 군역 종사 및 비용 등 적지 않은 부담이 있었지만 자신의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입신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므로 친기위 창설 초기 함경도 무사들은 친기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창설 초기에는 함경감사와 남북 병사들이 친기위의 선발과 관리만을 담당하였으나 1687년(숙종 13) 1월에는 이들에 대한 지휘권도 장악하였다. 3월에는 비변사에서 관리하던 친기위를 병조 소속으로 전환시켰으며 모든 제반 업무를 병조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변천

창설 이후 지휘 계통 및 관리 주체의 전환을 제외하고 큰 변화가 없던 친기위는 한동안 그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소속 군병들의 경제적 부담과 애매한 승진 규정, 그리고 국제 정세의 안정 등으로 인해 점차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친기위는 숙종 30년대 후반 다시 그 가치가 부각되었다. 이는 청나라 산동성과 요동성 일대 해안에서 활동하던 해적(海賊: 한자 삭제)들이 조선의 서해안을 침범할 우려가 높아진 것과 관련이 있다. 1710년(숙종 36) 9월 청 조정은 해적이 조선의 해안을 침범할 우려가 있음을 통보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각 도에 정예 기병 부대를 증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선 침입 가능성이 높은 북방에 기병 부대를 증강하였는데, 이듬해 600명의 친기위를 평안도에 설치하였다. 이들은 곧 별무사(別武士)로 개칭했으며, 함경도의 친기위도 증강되기 시작하였다.

1713년부터 함경도 친기위의 정원은 600명에서 1,200명으로 크게 증가되었다. 그리고 1년에 네 차례 시재를 치러 성적을 종합하여 가장 우수한 자는 출신(出身)이면 바로 변장에 임명하고 한량(閑良)이면 무과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直赴]. 그리고 공·사천이면 그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각 과목별 만점자인 몰기자(沒技者)에게도 가장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만 부여하던 혜택을 주었다. 이후 친기위에 입속하려는 무사들이 급속히 늘면서 정원이 더욱 증액되었다. 곧이어 1,400명으로 늘었고 1725년(영조 1)에는 1,800명으로 증가하였다. 1735년에는 2,400명으로, 1750년에는 3천 명으로 정원이 급증하여 함경 감영과 남·북 병영에 각각 1천 명씩 편성되었다. 이들을 위해 권관(權管) 네 자리가 별도로 배정되어 매년 시재 때면 성적 우수자를 감영과 병영에서 직접 임용하도록 하였다.

1750년 크게 증액된 이후 18세기 후반 정조대 들어 함경도 지역에 별친기위(別親騎衛)를 신설하는 논의와 함경도마병(馬兵)을 친기위로 전환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친기위 자체에는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1801년(순조 1)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고 함경도 남관의 친기위 3초(硝) 370명이 그 진압에 동원되면서 조정에서는 친기위를 유사시 유용한 군사력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1814년 남병사이석구(李石求)의 제안에 따라 남병영에 친기위 500명을 증액하고 이어 1820년에는 함경감사김이양(金履陽)의 요청으로 북관 지역에도 600명을 증액하여 모두 4,100명으로 증강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변장 자리도 기존 여섯 자리에서 감영 두 자리, 중령별장(中嶺別將), 부전령별장(赴戰嶺別將)·남병영 세 자리, 황토기이권관(黃土岐伊權管), 이동만호(梨洞萬戶), 쌍청보권관(雙靑堡權管)·북병영 세 자리, 보화보권관(寶化堡權管), 조산만호(造山萬戶), 주을온만호(朱乙溫萬戶) 등 모두 여덟 자리로 늘어났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점차 정예 병력으로서의 의미는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는 시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친기위의 전체적인 수준 하락을 막기는 어려웠다.

19세기 후반인 고종대에도 친기위의 편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시재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실제 군사력은 더욱 약해졌다. 친기위는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함경도 지역의 무사층들을 수용하는 제도로서 의미가 커지게 되었다. 대외적인 위기가 높아지면서 북변 방어를 위해 함경도와 평안도 강변 지역에 보병인 포군(砲軍)을 새로 설치하면서도 친기위는 활용하지 않은 것을 통해 그 군사적 위상 하락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의 친기위」, 『한국학보』89, 1997.
  • 강신엽, 「조선 후기 친기위」, 『경주사학』13, 1994.
  • 노영구, 「18세기 기병 강화와 지방 무사층의 동향」, 『한국사학보』1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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