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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1811년 홍경래(洪景來)가 주도하는 봉기군과 진압군이 평안도 박천의 송림에서 격돌한 전투.

개설

송림전은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당시 중앙에서 파견된 진압군과 봉기군이 평안도 박천의 송림에서 접전을 치른 사건이다. 남하하던 봉기군과의 송림 전투에서 진압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봉기군 수백이 사살되고 3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봉기군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역사적 배경

1811년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조선시대 이래 지속된 지방에 대한 차별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조선의 8도 가운데 지배층의 상당수는 이른바 삼남 지역이라고 불리던 영남·호남·호서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반면 함경도와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함경도는 그나마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풍패지향(豊沛之鄕)’, 즉 태조이성계의 고향으로 인식되어 간간히 중앙의 관심이 미치기는 하였다. 반면 평안도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이런 차별은 양반에 그치지 않고 지역민 전체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이어졌다.

한때 지방에 대한 회유책으로 평안도 지역 일부 인사를 특별히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제한적이었다.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며 경제적인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대청무역의 중심에 평양상인인 유상(柳商)과 의주상인인 만상(灣商)이 있었다. 또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의 경제력이 성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층의 불만이 고조되고, 신분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텄으며, 혹심한 흉년이 지속되면서 변화를 바라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여 난이 발생하였다.

발단

홍경래난의 주동자들은 난을 위해 10여 년 동안 동조자를 규합하고 군기(軍器)를 마련하였다. 가산 지역에서는 우군칙(禹君則)과 이희저(李禧箸)를, 곽산 지역에서는 홍총각(洪總角)과 김창시(金昌始)를, 개천 지역에서는 이제초(李齊初)를, 황주 지역에서는 김사용(金士用)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봉기를 위한 재원을 마련함과 동시에 광산 개발을 명분으로 내걸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이에 응했던 사람들은 대개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으로, 홍경래는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준비가 진행되던 중인 1811년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평안도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결국 1811년 12월 대원수(大元帥)라 불리며 난을 주도했던 홍경래를 중심으로 저항의 기치를 올렸다(『순조실록』 12년 1월 3일).

봉기 후 저항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북진군은 김사용을 중심으로 편성하였고, 남진군은 홍경래가 이끌었다. 난 발생 초기 봉기군의 기세가 상당하여, 서울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는 물론이고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였다. 특히 박천을 점령한 남진군은 이어 영변과 안주의 함락을 계획하였다. 남진군은 이를 위해 진격하는 과정에서 12월 24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박천에 도착하였다.

경과

봉기군이 박천에 도착하는 사이에 진압군은 전열을 정비하면서 백성들 가운데 봉기군에 내통한 이만봉(李萬奉)·김우학(金遇鶴) 등이 체포되거나 사형을 당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영변 공략이 여의치 않자 남진군은 안주로 그 공략 대상을 변경하였다. 남진군은 태천과 박천에서 재정비를 하고 12월 28일 송림리에 진을 쳤다. 이런 와중에 진압군은 평안감영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봉기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하였다. 마침내 12월 29일 박천의 송림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송림 전투 당시 봉기군과 진압군의 병력은 대체로 비슷했다. 송림에서의 접전 결과는 진압군의 승리였으며, 사살한 봉기군이 수백이었고, 체포한 자도 30여 명이었다. 이 전투로 봉기군이 무너져 흩어졌다는 지방관의 보고 등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순조실록』 12년 1월 4일). 남진군은 정주성으로 후퇴하였다(『순조실록』 12년 5월 5일). 봉기군은 정주성에서 3개월여 동안을 저항하였으나 결국 1812년(순조 12) 4월 진압군의 정주성 폭파로 궤멸되면서 진압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일정기(西日征記)』
  • 『진중일기(陣中日記)』
  • 오수창,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일조각, 2002.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한국인물사연구』11,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 오수창, 「조선후기 경상도·평안도 지역차별의 비교」, 『역사비평』59, 역사문제연구소, 2002.
  • 정석종, 「홍경래난의 성격」, 『한국사연구』7, 한국사연구회,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