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상(灣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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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의주를 근거지로 상업 활동을 전개한 지역 상인.

개설

만상은 평안도 의주를 근거지로 사행무역에 참여한 상인이었다. 만상이 참여할 수 있는 무역 형태로는 연경무역, 심양무역, 책문무역 등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교류하게 되자 만상의 공식적인 무역 활동 통로가 단절되어 밀무역을 통하여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가 다시 만상의 무역 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상인을 만상으로 제한하고부터다. 만상의 상업 활동 전개는 19세기 포삼제를 실시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포삼제는 홍삼 판매를 허용하는 대신 그 세금을 거두는 제도였다. 만상은 개성상인들이 제조한 홍삼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며 19세기 홍삼 무역을 주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만상이 활동한 지역은 평안도 의주였다. 의주는 고려시대에 용만(龍灣)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의주 상인을 만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의주는 압록강을 두고 조선과 청국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어 의주 상인의 활동 중심은 국내 교역보다는 국제 무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만상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중국으로 가는 사행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1년에 몇 차례 중국으로 사행이 파견되었는데 정기 사행인 동지행과 역행, 비정기 사행인 사은행과 진위행 등에 모두 만상이 참여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만상은 사행을 수행하는 각종 명목의 자리를 차지하여 무역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지역 상인들이 주로 국내 시장에 기반을 둔 반면 의주에 자리 잡고 있던 만상은 사행 무역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업행위였다. 이렇게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행 무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상인을 무역별장이라 하였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무역별장만이 중국과의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역별장은 그 지역 상인 중에 뽑히는 게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만상이 평양이나 개성에 비하여 3배 이상의 별포무역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했다. 『임원경제지』에서 “일본, 중국과 무역하여 거부가 된 자가 관서의 의주, 안주, 평양에 많다”고 한 것은 바로 별포무역의 권리를 만상에서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별포무역은 조정 및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에 대한 무역을 대행하는 것을 말한다. 의주부는 사행에 필요한 많은 물품을 만상에게 분담시켰고, 만상은 그 대가로 무역의 이익을 보장받았다. 권력과 상인이 결합한 결과가 바로 만상의 무역 참여였던 것이다. 만상은 사행을 통한 연경 무역뿐 아니라 책문과 심양 무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의 사행이 의주에 도착하는 순간 만상의 무역 준비도 본격화되었다.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하는 순간 무역은 진행되었다. 책문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책문에 모여든 중국 상인과 조선의 만상은 꽤 친숙한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었다는 풍경은 연행록 곳곳에서 확인된다. 책문무역에서 만상의 활동이 그만큼 활발했던 것이다.

만상의 책문무역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연복제를 이용한 형태이다. 연복제는 사행이 연경에서 책문으로 되돌아 올 때 의주부에서 사행의 정식 관원의 짐을 싣고 귀국할 빈 말을 책문으로 보내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때 책문까지 빈 말로 가지 않고 많은 은화를 싣고 가서 교역을 하고 다시 의주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무역활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마제를 이용한 형태이다. 여마제는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들어가는 중에 방물과 세폐를 실은 말이 쓰러질 것을 대비하여 여분의 말을 더 들여보냈는데 그 와중에 상인들은 약간의 은화를 받고 여마의 수에 제한을 받지 않은 채 상품을 싣고 들어가 무역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변천

만상이 공식적으로 참여한 책문무역은 1725년(영조 1)에 역관의 요청에 따라 불법화되었고,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청·일 직교역에 따라 만상의 무역 참여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었고, 정부는 1754년(영조 30) 책문무역을 다시 인정하는 길로 정책 방향을 바꾸고 만상에게만 책문무역의 참여를 공식 허용하였다. 이를 만상후시(灣商後市)라고 불렀으며 이들에게 허용된 무역량은 만포(灣包)라고 불렀는데 만상이 가지고 가는 팔포(八包)라는 의미였다.

18세기 후반 만상의 무역활동은 책문과 심양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중국 요녕성의 중후소에서 생산된 모자를 수입하여 조선에 판매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역관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 모자 수입권을 역관에게 몰아주고 판매는 만상을 비롯하여 모자전민, 송상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역관에 의한 모자 수입이 여의치 않자 1777년(정조 1) 만상과 송상으로 하여금 모자 수입과 국내 판매를 전담하게 하고 이에 대해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만상의 무역 형태도 바뀌게 된다. 이는 홍삼 무역의 활성화에 따른 것이었다. 초기부터 만상이 홍삼 무역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인삼의 재배와 홍삼의 제조는 개성상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홍삼 무역이 급성장하자 의주 상인의 무역 상품이 되었고 개성상인은 홍삼을 제조하는 생산자가 되었다. 홍삼이 국가재정 보충의 한 방편으로 떠오르자 19세기 후반 만상은 포삼별장이 되어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만큼 큰 이권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이후 청국 상인들이 원세개의 비호를 받으며 인천에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함에 따라 자연히 육로를 통한 사행무역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만상 가운데 활동 지역을 인천으로 옮겨 무역업에 투신하는 자도 생겨났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만상의 무역활동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의주­중강­책문의 교역장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 이철성,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두산동아, 2005.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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