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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7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에 불교 교단의 최고 고승에게 내려 준 명예직.

개설

국사(國師)는 국가와 백성, 제왕의 스승이 될 만한 고승에게 내려 준 봉호(封號)이다. 고승을 국사로 봉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으로 국사에 책봉된 승려는 북제(北齊)의 법상(法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국사를 임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로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王師)를 책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 태조대까지 유지되었다. 국사는 시기에 따라 국존(國尊), 국통(國統), 국로(國老)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신라시대의 국사들은 대개 감통(感通) 능력이 뛰어나, 주술적이고 신이한 일을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사의 이러한 능력은 왕의 정치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라 하대에는 주로 선승들이 국사로 추봉되었는데, 이는 당시 선종 승려들이 지방 세력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국사의 이러한 역할은 기본적으로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국사는 일종의 명예직으로, 국정은 물론이고 승정(僧政)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의 국사들이 책봉 의례를 치른 뒤 곧바로 하산소(下山所)로 지정 받은 사찰로 내려갔으며, 개경에 올라와 활동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만 원나라 간섭기 이후에는 이전과 달리 국사가 개경에 머물며 승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대우

국사는 최고의 승직(僧職)이자 명예직으로, 고려시대에는 재상의 지위에 비견되었다. 국사를 임명하는 과정에는 왕실의 권한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신하와 종문(宗門)의 의견을 물어 선정한 뒤에는 낭사(郎舍)의 서경(署經)을 거쳐야 했다. 국사가 정해지면 왕의 조서를 가진 중신을 해당 고승이 있는 사찰에 파견하여 책봉을 수락할 것을 청하는 서신지례(書紳之禮)를 행하고 개경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책봉 의식은 봉은사(奉恩寺)와 같은 큰 사찰에서 거행하였는데, 임명장인 관고(官誥)와 인장(印章)을 내려 주었으며 왕은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관고와 인장은 국사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때는 인장을 왕에게 돌려보냈고, 입적할 때는 인장을 봉함하여 시자(侍者)나 지방 관리를 통해 왕에게 전달하였다.

국가에서는 국사가 만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산소를 지정해 주었으며, 사찰에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국사는 입적할 때까지 다른 사찰로 전보(轉補)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하산소의 주지는 국사의 문도들이 계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말기에는 하산소가 지정되지 않거나 하산소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입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 국사는 하산소에서 입적하였다. 국사가 입적하면 문도들이 유서와 행장(行狀)을 왕에게 바치며 부음을 전하였고, 왕은 시호(諡號)를 내리고 관리를 파견해 장례 절차를 돕도록 하였다. 국사가 입적한 하산소에는 왕명으로 해당 승려의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대개 비음(碑陰) 즉 비석의 뒷면에는 문도들의 명단을 나열하여 후대에도 문도들이 사찰을 계승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것은 입적한 뒤 국사로 추증되는 경우에도 동일하였다.

또한 국사의 연고지가 승격되고, 부모에 대한 추증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충숙왕 즉위년에 정오(丁午)가 국통으로 책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순창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러한 사례는 견명(見明)·청공(淸恭)·보우(普愚)·천희(千熙)의 국사 책봉 때에도 나타났다.

국사에 대한 예우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국사로 책봉된 혼수(混修)는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태조에 의해 그 직위를 유지하였는데, 그가 입적하자 태조는 담당 관청에 명하여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신하를 보내 부도 조성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조구(祖丘)를 국사에 임명하면서 국사봉숭례(國師奉崇禮)를 거행하였다. 이때 내전에서는 108명의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 의식을 행하였고, 조구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태조실록』 3년 10월 21일). 이듬해에는 그의 고향인 담양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태조실록』 4년 1월 27일). 또한 조구가 입적하자 조회를 정지하여 애도를 표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14일).

변천과 운영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경흥(憬興)을 국로에 임명한 것을 최초의 국사 책봉 사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효소왕(孝昭王) 때에는 혜통(惠通)을 국사로 임명하는 등 국사를 책봉한 사례는 계속해서 발견되는데, 특히 신라하대에 선종이 유행한 뒤에는 고승이 입적한 뒤 왕명으로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건국 직후인 태조대에는 국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국가와 왕실의 스승으로 존숭을 받던 승려들을 왕사 또는 대사(大師)라 부르며 국가적으로 예우하였다. 왕에 의한 국사 책봉이 제도화된 것은 광종대로, 이때 이루어진 일련의 승정 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종대에는 원종(元宗) 대사(大師) 찬유(瓚幽)를 국사로 책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를 책봉하였는데, 전왕(前王)대의 인물을 그대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입적하면 다시 새로운 승려를 임명하였다.

국사 선정 기준은 분명치 않으나, 대개 당대의 유력한 종단에서 고승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국사의 배출은 교단의 성쇠를 보여 주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국사와 왕사는 서로 다른 종단의 승려를 임명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공민왕대부터 공양왕대까지는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과 사굴산문(闍崛山門)에서 선정하였다. 당대 최고의 승직이자 명예직이었으므로, 교종에서는 승통(僧統), 선종에서는 대선사(大禪師) 같은 최고의 승계를 가진 승려가 임명되었다. 또 대지(大智) 국사(國師) 법경(法鏡)의 경우처럼 왕사를 거쳐 국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외(無畏)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국사를 국통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국사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존으로 호칭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대까지는 왕이 국사와 왕사를 임명하는 제도가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마지막 국사와 왕사는 공양왕대에 임명된 승려 혼수와 찬영(粲英)이었는데, 태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이들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에 선왕이 임명한 국사와 왕사가 입적하고 나서야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392년(태조 1) 7월에 혼수가 입적하자, 1394년에 천태종 승려 조구를 새로이 국사에 임명하였다(『태조실록』 3년 9월 8일). 그러나 이듬해인 1395년(태조 4) 11월에 조구가 병으로 입적한 뒤에는 다시 국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태종 연간에 불교 교단을 통폐합할 때 비로소 국사·왕사를 봉하는 칭호를 없앴다는 사헌부의 상소 내용으로 미루어(『세종실록』 23년 윤11월 9일), 국사·왕사 제도는 태종대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下
  • 박윤진, 『고려시대 국사·왕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 원영만, 「고려시대 승관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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